산에서 재목을 베어내는 작업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어 왔는데, 이미 조선 초기에 강원도민이 농한기를 맞아 나무를 베어내어 뗏목을 만들고, 그것을 경강(京江)에 띄워 보내어 서울에 물건을 팔았으며, 또 전업으로 삼는 자도 있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와 같은 산판은 조선 후기 공인 등 목상(木商)이 등장함으로써 더욱 활기를 띠었다. 목상은 큰 자본을 가지고 일정 지역 전체 주민이나 산판일꾼에게 도급을 주어 재목을 얻었다.
이런 목상 외에도 각 영의 송군배(松軍輩)가 산밑의 주민들과 어울려 산판을 벌였다. 이때의 산판일꾼으로는 나무를 베는 벌작군(伐斫軍)과 그것을 져내는 부출군(負出軍)이 있었다.
조선 후기에 산림은 연료 채취 외에도 산판으로 크게 훼손되었으므로, 조정에서는 송금(松禁)을 강화하고, 민간에서는 금송계(禁松契)를 만들어야 할 정도였다. 그런데 교통이 불편하여 벌채를 면했던 압록강·두만강 등지의 산림도 20세기 초부터 일제에 의하여 남벌되기 시작하였다.
일제의 산림회사는 근방의 주민을 산판일꾼으로 고용하였는데, 그들은 추위를 잘 견디고 체력이 좋았으므로 일본인보다 효율적인 노동력이었지만, 일본인 임금의 반밖에 받지 못하였다. 1930년대에도 대규모 산림 훼손이 조직적으로 행해졌으며 이에 따라 산판일꾼들이 생겼다.
그들 중에는 근방의 주민도 있었지만, 몰락한 농민으로 생계가 막연하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당시 산판일꾼은 나무를 베는 작동, 베어낸 나무를 산 아래까지 운반하는 운자, 나무를 메고 트럭에 싣는 상차로 구분되었으며, 나중에는 각각 작동군·하산군·목도군으로 불렸다. 6·25전쟁과 그 뒤 연료정책의 미비로 산림이 크게 훼손되었으며, 많은 산판이 벌어졌다.
그러나 1960년대 이후 가용 산림의 축소와 정부의 강력한 산림보호정책 등으로 되도록이면 산림을 개발하지 않게 되어, 현재는 산판이 그 숫자와 규모상으로 현저하게 줄었다. 따라서 산판일꾼들의 면모도 상당히 변하였다.
산판은 주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인구가 희박한 산림지대의 오지에서 벌어지므로 산판일꾼의 의식주는 매우 불편하였고, 가족들과도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야 했다. 한창 일을 할 시기에는 명절일 때만 겨우 휴가를 얻었다.
또한 노동 자체도 매우 힘들 뿐 아니라 상해의 위험도 상당히 높았다. 그러므로 임금은 다른 막노동보다 높은 편이었고, 주로 농한기에 부업으로 노동을 하는 산판 근방의 주민을 제외하면, 산판일꾼 대부분은 그 출신이 매우 다양했다.
그들은 배운 지식이나 기술도 없고, 범죄자나 떠돌이, 혹은 도시로 나가지 못한 산골 청장년들이었다. 임금 수준이 높으므로 간혹 목돈을 마련하기 위해 산판일꾼이 된 사람들도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산판일꾼의 지위는 대단히 낮았다. 산판일꾼은 우선 힘이 좋아야 했으므로 군대를 제대할 나이부터 50세 정도까지의 남자 장년들이었다.
그들은 고된 작업이 끝나면 변변하지 못한 식사를 직접 해먹거나 산판을 따라다니는 간이식당의 밥을 먹었다. 또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나지막한 움막이나 엉성한 천막에서 화투 24장을 가지고 노는 곱새치기 노름을 하였고, 신이 나면 숫자풀이 같은 그들 나름의 노래를 불렀다. 그러나 현재는 그런 놀이나 전승은 거의 사라지고, 고스톱을 하거나 라디오를 듣는다.
산림지대의 노동시간은 일몰이 이르기 때문에 평지보다 상대적으로 짧고, 또 감독이 쉽지 않기 때문에 목상은 대개 산판일꾼의 감독에게 일정 지역의 벌채를 도급식으로 주었다. 이것은 일종의 성과급이다. 도급을 받은 감독은 데리고 다니는 일꾼들을 통솔하여 산판 일을 하였고, 그들 사이의 위계질서는 엄격하였다.
그런데 대규모 산판이 거의 없어진 1970년대 후반 이후 산판일꾼 구성에 큰 변화가 일어났다. 우선, 산판을 찾아다니는 전업적인 일꾼이 드물어졌다. 산판 일이 적어져 그 일만으로는 생활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산판노동이 고도의 숙련된 기술을 필요로 하지 않고, 또 전기톱이 산골까지 보급되었으므로, 목상들도 아예 산판 근방의 마을 주민 전체에게 도급을 주거나, 전기톱을 사용하는 사람을 일당 3만 5000원 정도의 임금으로 고용하여 작업을 시키게 되었다.
그리하여 전형적인 산판일꾼에 가까운 노동자로는 집을 떠나 농한기 한철에만 부업으로 일을 하는 산골 주민을 들 수 있게 되었다.
현재 임업기계훈련소가 강릉에 문을 열어 농·산촌 출신의 청년들을 임업노동자로 교육시키고 있다. 이곳에서 교육생들은 벌목·집재·운재에 전기톱·콜러·MB트랙터 등의 기계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고 있으며, 1987년까지 2,401명이 배출되었다. 이들의 고충은 대개 집을 떠나 천막생활을 하는 것이다.
앞으로 산판일꾼은 자격증을 가지고 기계노동을 하는 영림기사로 대치될 전망이다. 산판 일은 중졸 정도의 학력이면 숙련된 임업 종사자의 지도하에 업무를 수행할 수 있지만, 농업계 고등학교 또는 전문대학의 임학과에서 전문적인 지식을 배울 수 있다.
자격·면허로는 국가기술자격법에 의한 기사 자격으로 영림기사 1·2급, 임산가공기사 1·2급, 임업종묘기사 1·2급이 있고, 기능사로는 영림기능사, 임산가공기능사, 임업종묘기능사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