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휴는 묘향산 내원사(內院寺)에 거처하던 승인(僧人)으로, 1421년 승인 8명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들어갔다. 이들은 요동 도사(遼東都司)에게 글을 올려 황제에게 아뢰어 불법을 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하였다. 조선의 사신이 사행길에서 우연히 이들을 만나면서 행적이 알려지게 되었고, 의금부에서는 적휴의 친척, 제자를 가두었다가 이내 풀어주었다. 조정에서는 적휴가 역(役)을 피해 승이 되어 도망간 자임을 명나라에 주달하여 외교 문제로 비화하지 않도록 대응하였다.
기존에는 중국에 건너간 승인이 상강(尙强)으로 알려지기도 하였고, 이 사건의 성격을 태종의 배불 정책을 명 황제에게 알려 지원을 받으려 한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는 모두 정확한 사실이 아니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상강은 적휴의 당제(堂弟)로, 적휴 등이 중국으로 건너간 것이 알려지자 의금부에 하옥된 인물일 뿐이다.
그리고 적휴가 요동 도사에게 올린 글에 따르면, 적휴 등은 정광여래(定光如來)의 사리 2개, 왕사(王師) 나옹(懶翁)의 사리 1개를 가져가 바치면서 명나라에서 불법을 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요청하였을 뿐이다. 태종이 승정 체제를 개혁하며 불교계에 대한 지원을 크게 감축하자 중국에 건너간 것일 수는 있으나, 조선의 불교 정책에 대한 명나라의 개입을 요청하기 위해 갔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적휴 등이 중국으로 건너간 사실을 과장되게 해석하여 온 것은, 일제 관학자 다카하시 도루[高橋亨]의 『이조불교(李朝佛敎)』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다카하시는 적휴의 사례와 함께 1419년(세종 1) 승인 30명이 도망하여 중국에 들어간 사건에 대해 거론하면서, ‘직접 명나라 수도에 가서 조선의 불교 박해의 정상을 상소하여 이 문제에 간섭해 줄 것을 요청한 사건’이라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1419년 승인 30명이 중국에 건너간 사건의 경우에도, 『세종실록』의 해당 기사에 의하는 한, 그들이 어떤 목적으로 가서 어떤 행위를 하였는지 분명하지 않다. 다만, 승정 체제 개혁에 따른 사사전(寺社田) 혁파 등을 원망하여 승도가 중국에 들어갈 수도 있는 상황임을 당시 상왕인 태종이 우려했을 뿐이다.
조선시대 불교 정책과 제도가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자에 의해 잘못 파악되거나 과장 서술됨으로써, 조선시대 역사상 형성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단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