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적원은 고려시대부터 경적(經籍)의 인쇄를 맡아온 관아였다. 고려 문종 때 서적점(書籍店)을 설치한 것이 최초이다.
그 뒤 서적포(書籍鋪)·서적원 등으로 명칭이 바뀌어지면서 목판인쇄(木版印刷)를 맡아오다가 주자인쇄(鑄字印刷)를 실시하면서부터 양자를 모두 관장하였다. 13세기 전기에 중앙관서가 실시한 주자인쇄는 원나라의 지배를 받으면서 그 기능이 마비되었다.
그러나 고려 말기 배원사상(排元思想)이 싹트고 주권의 복구의식이 대두하면서 다시 전과 같이 서적포를 설치하여 주자를 두고 경(經)·사(史)·자(子)·집(集)의 책은 물론 의서(醫書)·병서(兵書)·율서(律書) 등을 고루 찍어 학문에 뜻을 둔 사람들의 독서를 권장해야 한다는 건의가 있었는데, 이러한 취지는 고려 말과 조선 초의 학자인 정도전(鄭道傳)의 《삼봉집 三峯集》에 수록된 〈치서적포시병서 置書籍鋪詩並序〉에 잘 나타나 있다.
그 결과 1392년(공양왕 4) 정월에 그것이 마침내 제도상으로 반영되어 서적원이 생기고, 주자인쇄업무를 관장하는 영(令)과 승(丞)의 직책이 마련되었다.
그 뒤 조선 태조가 관제를 새로 제정하였을 때도 이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였다. 이 목활자는 김지(金祗)의 발문에 의하면, 당시 백주지사(白州知事) 서찬(徐贊)이 만들어 1395년에 서적원으로 보낸 것이며, 이 활자로 《대명률직해 大明律直解》 100여 부를 찍어 반포하였다는 것이다.
이렇듯 당시에는 서적원이 목활자로 여러 종류의 책을 간행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모두 없어져서 그 규모를 알기가 어렵다. →활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