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총(釋聰)은 태봉국을 세웠던 궁예의 측근 승려였으나 후에 고려를 건국한 왕건을 추종하였다. 8세기 중반에 활동했던 진표(眞表)의 법맥을 계승한 인물 중 하나로 그 상징이 되는 진표의 가사와 간자(簡子)를 왕건에게 전해주었다는 석충(釋冲)과는 동일 인물일 가능성이 높다. 궁예가 스스로 미륵불을 자처하며 경전 20여 권을 지었는데, 그 말이 요망하고 모두 도리에 맞지 않았다. 이에 석총은 “모두 사악한 설과 괴상한 말로 교훈이 될 수 없다”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분노한 궁예는 석총을 철퇴로 내리쳐 죽게 하였다. 석총의 죽음과 관련된 정황 등을 통해 볼 때 진표계 법상종이 궁예와 대립하며 핍박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내용은 『삼국사기(三國史記)』의 궁예열전과 이를 인용한 『대동선교고(大東禪敎考)』에 실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