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란이 발생한 시기와 원인은 정확하지 않으나 경상감사 조강하(趙康夏)의 장계에 의하면, 시기는 8월 초 이전이며 결가(結價)를 바르게 정하지 않은 것이 원인이었다.
난민들이 작당하여 동헌에 난입하여 목사를 떠메고 경계를 넘으려고 하였다. 조정에서는 안동부사 조병호(趙秉鎬)를 안핵사로 보내어 사실을 조사하고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난을 주도한 수창자 정중집(鄭仲執) 등 4인은 성주목 교장(校場)에서 효수하였고, 나머지 사람들은 경중을 구분하여 처벌하였다.
김용발(金用發)·이금술(李今述)·이상이(李尙伊)·박성관(朴性寬)·이원정(李源正)은 엄형 2차 후에 원악도(遠惡島)에 정배하고, 이성유(李性有)·이순서(李順瑞)·이계명(李啓明)·두치서(杜致瑞)·시소일(施素一)은 엄형 1차 후에 원지(遠地)에 정배하였다.
이하수(李夏秀) 이하 14인과 도윤조(都閏祚) 등은 도(道)에서 등급을 나누어 귀양을 보내고, 박이인(朴以仁) 등 21인은 징계하여 석방하였다.
한편, 관장을 보살핀 전 호장(戶長) 도한구(都漢求), 수교(首校) 배성우(裵成祐) 등에게는 목(牧)에서 상을 내렸고, 목사 이용준(李容準)은 공적을 생각하여 연임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