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지역 부근에는 본래 조선 초기 이래 삼전도(三田渡)가 나루터로 개설되어 있었지만 병자호란 이후 쇠퇴하였으며, 대신 이 송파진이 주된 나루가 되어 수어청(守禦廳)에서 파견된 별장(別將)에 의해 관리되었다.
송파진은 하중도(河中島)를 끼고 있어 삼전도보다 물이 풍부하여 좋은 포구 조건을 가졌고, 맞은 편에 있는 뚝섬의 조건이 좋지 못하였기 때문에 크게 번성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상공업의 발달로 물화(物貨)의 유통량이 크게 늘어난 조선 후기에 송파는 원주·춘천·충주·정선·영월·단양 등 한강상류지역에서 내려오는 각종 물화의 집산지가 되었다.
강운(江運)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이곳을 지나 판교·용인을 거쳐 충청도·강원도로 가는 길, 또 용인을 거치지 않고 광주·이천을 거쳐 충주나 여주·원주를 거쳐 대관령·강릉으로 가는 길이 열려 있어 사람과 말의 통행이 번잡하였다.
그리고 도성(都城)에서 20리밖에 떨어지지 않았으므로, 강상(江商)은 물론 이현(梨峴)·칠패(七牌) 등 각 시장의 상인과 중개상인, 그리고 주민들이 장을 이용할 수 있었다. 송파시장이 번영하자 인근 70∼80리 지역의 상인과 주민이 장에 나오기도 하였다.
이러한 지리적 요건이 송파시장을 발달시킨 이점이기도 하지만, 송파가 행정구역상 서울이 아닌 광주유수부에 소속되어 금난전권(禁亂廛權)이 미치지 못하였던 점도 중요하다.
시전상인들은 도성 안에서는 독점권을 철저하게 행사했지만, 이곳은 그런 제약이 없었으므로 한강의 사상도고(私商都賈)는 물론이고 전국 각지의 상인들이 자유롭게 상거래를 할 수 있었다.
송파시장은 《만기요람》에서 전국 15대 장시의 하나로 꼽힐 만큼 대규모의 시장이었고, 5일·10일장이라고는 하나 상설시장화하였다. 노천의 가점포가 있던 장터는 취락의 한가운데 자리잡았고, 그 주변에는 여각·객주·술집·대장간 등 각종 수공업점포가 즐비하였다. 이렇게 흥청거리는 시장에서 광대들은 〈송파산대놀이〉를 벌였다.
한말에는 짐을 보관하는 창고와 10∼20여 개의 객실과 마방(馬房)을 갖춘 여각이 두 곳 있었고, 수십 칸의 객주 한옥이 있었다. 객주는 여각보다 건물의 규모가 작고, 취급물품도 부피가 작았다.
중개상인에게 물품판매를 위탁한 지방상인은 대금을 받을 때까지 이곳에 유숙하였다. 송파시장의 남쪽, 즉 광주(廣州)와 판교 쪽으로는 우시장이 있었는데 특히 대구와 안동에서 많은 소장수들이 올라왔다. 그리고 나루터 오른편 버드내에는 도살장이 있었다.
거래된 물품은 미곡·잡곡·소·포목·과실·재목·땔감·연초·잡화 등 다양하였다. 또한 함경도·평안도·황해도 등지의 물산도 서울을 거치지 않고 이곳으로 운송되어 거래되었다. 그 거래의 주도권은 강상 중에서도 송파상인이 잡았다.
9세기 초엽에 이곳을 중심으로 사상도고가 크게 번성하였고, 그 중 손도강(孫道康)이라는 대상인은 광주·양주부사에게도 자금을 받아 원산까지 가서 어선째 계약하여 실어오기도 하였다.
영조 때 시전상인들이 자신들의 상권을 위협하는 송파시장의 폐지를 주장한 사실에서도 송파상인의 재력과 거래규모가 상당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개항 이후 교통과 산업이 발전하고, 독점상업권이 해체되고, 조선상인이 몰락하는 등 경제계가 대폭 재편되자 송파시장도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송파시장은 본래 서울의 길목이란 이점을 가지고 물화의 집산지 내지는 중개상업지로 발달했던 것이다.
또한 금난전권과 포구에서의 관리들의 수세와 탐학이 사상들의 물화를 이곳에 잠시 멈추게 한 것이었다. 그런데 개항 이후 경제의 중심은 인천 쪽에서 마음대로 들어오는 외국의 수입품과 상인들에게 치우쳐버렸다.
그리고 충청도·강원도에서 오는 물화도 지체할 이유가 없었다. 따라서 송파시장은 차츰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조사상으로는 1909년 1개년의 거래액이 21만 6,000원(圓)에 달하였다.
그러나 1910년대 들어서면서 더욱 쇠퇴하였고, 1910년대 말에는 유명하였던 우시장도 여타의 군지역 시장과 비슷한 5,000여 두의 소만 거래되었을 뿐이었다. 더욱이 1925년의 대홍수로 마을 전체 273호가 유실되어, 1㎞ 떨어진 가락동과 석촌동의 구릉지로 취락 전체가 이전했고, 시장은 폐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