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위의」에서는 시의 ‘선읍벽(善泣癖)’을 금기하고 ‘서늘오움’의 시학(詩學)을 주장하고 있다. 즉, 남을 슬프게 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감정을 억제해야 하고, 남을 웃기려 할 경우 자신이 먼저 울어 실소(失笑)를 폭발시키는 것은 소인극(素人劇)에서조차 적의(適宜: 걸맞아 하기에 마땅함)하지 않다는 것이다.
“안으로 열(熱)하고 겉으로 서늘옵이란 일종의 생리를 압복(壓伏)시키는 노릇이기에 심히 어렵다. 그러나 시의 위의는 겉으로 서늘옵기를 바라서 말지를 않는다.”라고 한 이 말은 정지용의 시론을 논할 때 자주 인용되고 있는 바, 정지용의 핵심적 시관(詩觀)을 이루고 있다. 시의 감격벽(感激癖), 즉 감정의 배제와 지양이 시의 위의가 된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감격벽이 시의 미명(美名)이 아니고 어느 한 순간의 육체적 지진으로 말미암아 예지(叡智)의 수원(水源)이 붕괴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정지용의 시작 원리가 되고 있는 셈이다.
감정적 속성을 유일한 수단으로 하여 침울(沈鬱)하고 슬프고 울려고 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슬픈 어머니가 기쁜 아기를 낳듯이 정열 · 비애 · 감격과 같은 것이 시의 본질일 수는 없고, 다만 이들 감정적인 속성은 시적 동인(詩的動因)으로 작동할 따름이다.
따라서 시인은 이런 감정적 속성을 제어하고 반성하여 그 조화와 질서를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작(詩作)에 있어서 안으로 열하고 겉으로 서늘옵게’ 하는 것은 시의 위의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시작 원리로서 정지용의 시작 과정에도 잘 적용되고 있다.
정지용의 이러한 시작 태도는 감정의 절제로 나타나는데, 실지 작품에서도 거의 슬픔이나 눈물과 같은 감정적 속성이 거의 드러나 있지 않다. 이를테면 자신의 어린 아들을 잃고 썼다는 「유리창(琉璃窓)」과 같은 작품은 그 좋은 예가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