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랑(述郎) · 남랑(南郎) · 영랑(永郎) · 안상(安詳, 安常) 등의 네 사람으로 대체로 효소왕 때를 전후하여 활약하였다고 알려져 있으나 일설로는 신라 이전 사람들이라고도 한다. 영남 또는 영동 사람들이며, 신라시대 이래 선인(仙人)으로 유명하다. 『해동고승전(海東高僧傳)』에는 “신라 역대의 화랑도 가운데 사선이 가장 현명하였다(四仙最賢).”라고 하였고, 『파한집』에는 “3,000여 명의 화랑 중에서 사선문도가 가장 번성하였다.”는 구절이 있다.
그들은 자주 강원도지역으로 놀러 다녀 많은 유적을 남기고 있다. 고성 해변에 그들이 3일을 놀고 간 삼일포(三日浦)가 있고, 통천에는 사선봉(四仙峰)과 총석정(叢石亭), 간성(杆城)에는 선유담(仙遊潭)과 영랑호, 금강산에는 영랑봉(永郎峰), 장연(長淵)에는 아랑포(阿郎浦), 강릉에는 한송정(寒松亭)이 있다. 특히 한송정에는 이들과 관련된 다천(茶泉) · 돌아궁이[石竈] · 돌절구[石臼]가 있는데, 모두 사선이 놀던 곳이다.
고려 건국년(918)에 행해진 팔관회의 백희가무(百戱歌舞)에는 사선악부(四仙樂府)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화랑도와 관계있는 팔관회에서는 매년 설회(設會) 때 사선의 전통을 계승하여 가무로 표현하였다. 이인로(李仁老)는 “사선은 신라의 나그네, 한낮에 신선되어 하늘로 올랐네. 천년 전 자취를 생각하니 삼신산(三神山) 불사약의 효험이런가(四仙羅代客 白日化飛昇 千載遺蹟 三山藥可仍).”라는 시를 남기고 있다.
사선 가운데에서 영랑은 우리나라 선파(仙派)의 우두머리인 환인(桓因)의 도맥을 단군과 문박(文朴)을 통하여 이어받아 신녀보덕(神女普德)에게 전하여 주었다고 한다. 중국이 아니라 우리나라 고유의 선풍을 계승한 영랑은 향미산(向彌山) 사람으로 나이가 90이 되어서도 안색이 어린아이 같았고, 노우관(鷺羽冠:백로의 깃으로 만든 관)을 쓰고 철죽장(鐵竹杖:검은 대나무 지팡이)을 짚으며 산수를 노닐었다고 전해진다. 술랑 · 남랑 · 안상의 삼선의 행적은 전하여지는 것이 별로 없으나 이들도 영랑과 비슷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