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5년 3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조직되었던 독립 운동 단체이다. 북경에 있던 성낙형(成樂馨) · 유동열(柳東說) 등 독립 운동가들이 상해로 가서 박은식(朴殷植) · 신규식(申圭植) 등 동제사 간부와 이상설(李相卨) · 이춘일(李春日) · 유홍렬(劉鴻烈) 등을 만나 조직을 협의하였다. 고종을 당수로 추대하고 본부장에 이상설이 추대되었고, 외교부장은 성낙형, 교통부장은 유동열, 재정부장은 이춘일, 상하이지부장은 신규식, 감독은 박은식, 창춘지부장은 이동휘(李東輝) 등이 각각 맡았다. 활동은 별다른 성과 없이 중단되고 말았다.
동제사 간부들이나 유동열 등이 이미 공화주의자로 변신하고 있었음에도 이처럼 제정체제를 표방한 것은 일종의 임시 방편책이었다. 그런데 명문 양반 가문 출신인 성낙형이 이를 주장한 것을 보면, 그는 신한혁명당 결성에 주도적 구실을 한 것으로 보인다.
본부는 북경에 두고, 지부는 중국의 상하이 · 한커우(漢口) · 펑톈(奉天) · 창춘(長春) · 안둥현(安東縣) · 옌지부(延吉府), 국내의 서울 · 원산 · 평양 · 회령 · 나남 등지에 두었다. 고종을 당수로 추대하고 본부장에 이상설이 추대되었고, 외교부장은 성낙형, 교통부장은 유동열, 재정부장은 이춘일, 상하이지부장은 신규식, 감독은 박은식, 창춘지부장은 이동휘(李東輝) 등이 각각 맡았다.
이들은 두 가지 활동 방침을 세웠다. 하나는 전쟁이 일어날 경우 중국을 지원하기 위해 안펑선(安奉線) 철도를 파괴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고종으로부터 위임을 받아 중국 정부와 중한의방조약(中韓誼邦條約)이라는 밀약을 맺는 것이었다.
그런데 첫 번째 구상은 중국의 위안스카이(袁世凱)가 일본의 21개조 요구를 모두 수락함으로써 무산되고 말았다. 두 번째 구상도 성낙형이 1915년 7월 서울에 들어와 변석붕(邊錫鵬) 등 수 명과 함께 고종의 밀명을 받을 방법을 협의하던 중 일본 경찰에 붙잡힘으로써 이 또한 수포로 돌아갔다.
두 가지 구상이 모두 무산된 이후 활동은 별다른 성과 없이 중단되고 말았다. 이처럼 활동이 쉽게 중단되었던 것은 국제 정세에 대한 그들의 분석이 중국의 일본에 대한 굴복으로 빗나가 버린 데에 가장 큰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당시 동제사의 간부인 신규식 등은 중국 국민당(國民黨)과 긴밀한 관계를 계속 가지는 등 공화주의 노선을 밟고 있었기 때문에, 제정을 표방하는 신한혁명당의 활동에는 소극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