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복사는 신라의 자장율사가 창건한 북한 황해북도 장풍군 용봉산(龍鳳山)에 있었던 사찰이다. 651년 창건하였고, 1219년에 승려 천희가 중창하였다. 조선 태조의 왕사 자초가 1396년에 중창하였으며, 10층 다보탑을 세웠다. 임진왜란으로 1,000여 칸의 전각들이 소실되었다. 1644년 승려 인감과 일원이, 1649년 승려 이이 등이 중건하였다. 정조의 딸인 숙선옹주의 원당이었다. 1821년 고승 영암이 암자 보광암을 창건하고 지탁이 20여년 주석하였다. 1932년 주지 임태화가 요사채 16칸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651년(진덕여왕 5)에 신라의 고승 자장(慈藏)이 창건하였다. 자장은 산세를 살핀 후 삼사구암(三寺九庵)을 짓고 주석하면서 용봉산의 심장의 위치에 해당되는 곳에 절을 짓고 심복사(心腹寺)라 하였다.
그 뒤 폐허가 된 것을 1219년(고종 6)에 중국에서 온 승려 천희(天熙)가 중창하였다. 고종은 노비 약간 명과 전답 250여 결을 하사하였다.
조선 태조의 왕사 무학자초가 1396년(태조 5)에 경기도 화성에서 와서 대웅전과 응진전(應眞殿) · 명부전 · 영자전(影字殿) · 좌우선승당(左右禪僧堂) · 동서별실(東西別室) · 만세루(萬歲樓) · 종루(鐘樓) 등을 지었으며, 대웅전 앞에 10층 다보탑을 세웠다. 태조는 중향촉과 전답 200결을 하사하였다.
임진왜란으로 1,000여 칸에 달하던 주1들이 모두 소실되었으나, 1644년(인조 22)에 인감(印鑑)과 일원(日元)이 법당과 승당을 중건하였고, 1649년에는 이이(頤怡) · 인준(印俊) · 현오(玄悟) · 태희(太熙) 등이 좌우선당과 동서별실 · 누각 · 불전 · 주2 등을 중건하였다.
1681년(숙종 7)에는 창건 및 중창주의 뜻을 기리기 위하여 사적비를 세웠고, 1684년에는 대중이 합심하여 다보탑을 중수하였는데, 중수 사적 2건을 작성하여 1건은 탑 속에 주3 1건은 사내(寺內)에서 전승되도록 하였다. 위실각 현판문에 의하면 심복사가 정조의 딸인 숙선옹주(1793~1836)의 주4이었다. 위실각은 2칸으로 숙선옹주 완산 이씨 선가(淑善翁主 完山李氏 仙駕) 위패문 제상 1개, 목제 촛대 1쌍, 목제 향로 1개, 사기 향로 1개가 있었으며, 이 밖에 승방 2칸, 전후(前後)와 공청(空廳)이 각각 6칸이 있었다.
1821년에 고승 영암(映庵)이 암자 보광암을 창건하고 삼봉지탁(1750-1839)이 신호(信浩) 장로를 20여 년을 모시면서 거처하였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승려 태화(泰化)가 관음탱화 1축을 그려 조성하고 1926년에 대웅전과 요사를 건립하였다. 1929년에 승려 태화가 상단 신중산신탱화 3축을 그려 조성하고, 그 뒤 1932년에 주지 임태화(林泰化)가 동서에 요사채 16칸을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심복사 칠층탑은 고려시대 탑의 건립 양식과 축조기술을 엿볼 수 있는 북한의 보존급 제532호로 지정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