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안 안흥진성 ( )

건축
유적
문화재
충남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에 자리하고 있는 조선 시대 진성(鎭城).
이칭
이칭
안흥진성(安興鎭城)
유적
건립 시기
1583년
관련 국가
조선
관련 인물
이팽조, 김석견
높이
5~6m
둘레
1,714m
면적
38,658㎡
소재지
충남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 1155-1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1976년 01월 08일 지정)
소재지
충남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 1155-1
시도지정문화재
지정기관
충청남도
종목
충청남도 시도기념물(1976년 01월 08일 지정)
소재지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 1155-1
내용 요약

태안 안흥진성은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에 자리하고 있는 조선시대 진성(鎭城)이다. 바다와 강도(江都)를 함께 방어하고, 조운선을 호송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전체 성벽의 둘레는 1,714m이며, 성벽의 잔존 상태가 양호하다. 특히 남문지 주변에는 여장까지 잘 남아 있어 조선 후기 성곽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대동지지』에는 안흥진성이 1655년에 축조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성내에서 발견된 각자성석(刻字城石)에 의해 1583년에 초축된 것을 확인하였다. 1655년은 수축(修築)한 해로 보여진다.

정의
충남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에 자리하고 있는 조선 시대 진성(鎭城).
발굴 경위 및 결과

안흥성은 조선 전기에는 소근진(所斤鎭) 첨사(僉使)가 군사를 나누어 지키던 안흥량수(安興梁戍)였는데, 1609년(광해군 1)에 수군첨절제사진으로 승격되었다. 다른 일반적인 진성(鎭城)과 달리 바다에 대한 방어뿐만 아니라 강도(江都)에 대한 외곽 방어, 조운선(漕運船)에 대한 호송 등을 담당하던 중요한 진성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안흥진성의 축성법과 성내 시설물의 현황을 파악하기 위한 지표 조사와 시 · 발굴 조사가 이루어졌다.

건립 경위

태안 안흥진성이 자리한 안흥 지역은 삼남 지역의 조운선이 통과하는 지역이고, 지리적으로 강도(江都)와 가까운 곳이다. 그러면서도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난행량(難行梁) 지역이기도 하다. 따라서 조운선의 안전한 호송, 그리고 강도 지역의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안흥 지역에 성곽이 자리할 수밖에 없었다.

태안 안흥진성의 축성 시기에 대해서 『대동지지』에는 1655년(효종 6)에 사인(士人) 김석견(金石堅)의 건의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되어 있다. 하지만 내용을 살펴보았을 때, 1653년에 안흥에 신진(新鎭)을 설치하고 그 신진에 성을 쌓는 것을 의논하는 것으로 보아, 구진(舊鎭)은 그 이전에 설치되어 있었고 이미 성곽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태안 안흥진성에 대한 정밀 지표 조사 결과, 만력(萬曆) 11년(1583)이라 새긴 각자성석(刻字城石)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이로 인해 태안 안흥진성이 만들어진 시기는 1583년이고, 그때 안흥성이 주1 된 것으로 보인다.

변천

태안 안흥진성은 조선 전기만 해도 안흥량수에 불과하였지만, 1609년(광해군 1)에는 거진(巨鎭)이 되었다.

1675년(숙종 1)에는 태안 안흥진성에 주2을 설치하고 태안 군수를 무관(武官) 가운데 선택하여 안흥 주6를 겸임시킴으로써 안흥성 방어를 전담시키기도 하였다. 이 조치는 1680년(숙종 6)에 폐지되었다.

1706년(숙종 32)에는 태안 방어영이 설치되고, 태안 안흥진성이 속영(屬營)으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러한 조치에도 안흥 방어가 소홀해지게 되어, 1711년(숙종 37)에는 다시 안흥 방어영을 재설치하였다. 이때에는 안흥 첨사가 수군 방어사를 겸임하여 태안 군수가 방어사가 되었을 때의 폐단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이 또한 충청 수영(水營)전선(戰船)을 안흥 방어영에 분급하는 문제가 불거지면서 1712년 5월에 폐지되고 말았다.

1779년(정조 3)에는 태안 안흥진성을 폐지하고 대신 홍충도 수영의 행영(行營)을 설치하는 조치가 결정되었다. 강도(江都)의 방어를 강화하면서 충청 수영에 대한 주7를 향상시키려는 목적이었다. 그렇지만 행영에 본영의 전선(戰船)을 옮길 수 없게 됨에 따라 1790년(정조 14)에는 행영이 폐지되고, 태안 안흥진성에 첨사를 다시 설치하였다.

1866년(고종 3)에는 외부의 침략을 막고, 변란을 제압하자는 취지로 태안 방어영이 다시 설치되었지만, 여러 문제점이 드러나 1885년(고종 22)에 태안 안흥진성이 다시 설치되었다. 이후 안흥진성은 1895년 을미개혁 때 다시 폐지되었다.

형태와 특징

태안 안흥진성은 바다를 향해 돌출된 구릉의 서쪽 끝에 자리하고 있다. 해발 80m 정도 되는 나지막한 구릉 4개를 에워싸면서 만들어졌는데, 산봉우리와 산봉우리 사이의 마안부(馬鞍部)에 성문이 자리하고 있다. 동문은 수성루(壽城樓), 서문은 수홍루(垂虹樓), 남문은 복파루(伏波樓), 북문은 감성루(坎城樓)라 부른다. 성벽은 다른 일반적인 조선 시대 성곽과 마찬가지로 하단부의 성돌이 크고, 위로 올라가면서 성돌이 점점 작아진다. 다만 동벽의 경우 다른 구간과 달리 조잡한데, 『비변사등록』에 보면 1750년(영조 26)에 큰 비가 내려 동벽이 붕괴된 일이 있다고 한다. 이렇게 붕괴된 부분을 다시 쌓아 현재와 같이 조잡하게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의의 및 평가

태안 안흥진성은 축성 시기를 알 수 있는 성곽이다. 주3(刻字城石)을 통해 문헌 기록과 달리 1583년에 초축한 사실을 알 수 있고, 또 『대동지지』의 기록을 통해 1655년에 쌓기 시작해 1656년에 증축한 것을 알 수 있다. 1750년(영조 26)에 큰 비로 성벽이 붕괴되어 주5했다는 문헌 기록이 있는데, 이런 영향 때문인지 현재도 동벽만은 조잡하게 남아 있다. 태안 안흥진성은 성벽의 전존 상태가 양호하고, 특히 주4까지 잘 남아 있어 조선 후기 성곽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원전

『효종실록』
『대동지지』
『비변사등록』

단행본

『안흥진성』(이남석·서정석, 1995)
『안흥진성 -성벽 절개조사 보고서-』(충남역사문화연구원, 2008)
『태안 안흥진성 -2차 발굴조사 보고서-』(충남역사문화연구원, 2014)
『태안 안흥진의 역사와 안흥진성』(충남역사문화연구원, 2020)
『태안 안흥진성의 문화재적 가치와 활용 방안』(충남역사문화연구원, 2020)

논문

서정석, 「태안 안흥진성에 대한 일고찰」(『역사와 역사교육성』 3·4합진, 웅진사학회, 1999)
서태원, 「조선 후기 충청도 안흥진의 설치와 변천」(『역사와 실학』 50, 역사실학회, 2013)
서태원, 「조선 후기 충청도 안흥진의 구조와 기능」(『역사와 실학』 51, 역사실학회, 2013)
주석
주1

조선 시대에, 진관제에서 동첨절제사, 수군만호, 병마도위를 배치하던 곳. 우리말샘

주2

조선시대 방어사(防禦使)가 있는 영문(營門). 역사용어시소

주3

축성 시기나 구간, 책임 군현 등의 정보를 새겨 놓은 성돌.

주4

성 위에 낮게 쌓은 담.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하거나 한다. 우리말샘

주5

집이나 다리, 방죽 따위의 헐어진 곳을 고쳐 짓거나 보수함. 우리말샘

주6

조선 시대에, 나라의 방위를 위하여 군사 요지에 보내던 종이품 무관 벼슬. 우리말샘

주7

거느려서 제어함.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서정석(공주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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