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책. 채색지도가 첨부된 필사본. 내용 구성은 건치연혁(建置沿革)·강계(疆界)·산천(山川)·도서(島嶼)·토산(土産)·방리(坊里)·호구(戶口)·전부(田賦)·군액(軍額)·관봉(官俸)·환곡(還穀)·세액(稅額)·풍속(風俗)·민업(民業)·요역(徭役)·제언(堤堰)·장시(場市)·역원(驛院)·점막(店幕)·교량(橋梁)·사찰(寺刹)·봉수(烽燧)·관방(關防)·진도(津渡)·기우제단(祈雨祭壇)·단묘(壇廟)·관해(官廨)·고적(古蹟)·누정(樓亭)·총묘(塚墓)·향현고적(鄕賢古蹟)·파릉팔경(巴陵八景)·환적(宦蹟)·충효정려(忠孝旌閭))·열녀(烈女)·과방(科榜)·인물성씨(人物姓氏) 등으로 되어 있다.
특기할 사항으로는 이 읍지에 독특하게 수록된 민업조·점막조를 들 수 있다. 민업조에는 이 지역 주민들의 생업으로 농업과 상업을 기록하였으며, 상업 중에서도 땔나무와 소금장사를 지적하였다.
이는 양천군이 한강변의 여러 읍 중 특히 수해가 심하기 때문에 흉년을 감당하기 어려워 주민들이 농사 중에도 틈틈이 서울에 들어가 여러 물화를 교역하여 가용을 돕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인구 1,000여 호의 소읍(小邑)인 양천군이 서울로 들어가는 한강 남서쪽 길목에 위치하여 상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점막조에도 5개소의 점막이 기록되어 한강 수운 교통을 이용한 상업 활동이 활발하였음을 알려준다.
이는 관방조의 “대로(大路)가 남동쪽에 있어 한양으로 통하고 북쪽으로는 김포·통진·강화·교동으로 통하여 서울로 왕래하는 길목이며 한강수로의 요충이기 때문에 성(城)을 설치하고 읍의 치소를 옮겨 설치하였다.”는 기록에서도 확연하게 드러난다.
19세기 말의 서울 주변 지역의 실상을 비교적 상세하게 이해할 수 있는 종합적 지지로서 의의가 있다. 규장각도서에 있다. 이 밖에도 편년 미상의 ≪양천현읍지≫와 고종대에 편찬된 ≪양천현읍지≫가 규장각도서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