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문은 어로생활을 통한 풍요를 기원하는 주술적인 의미를 지닌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인류가 생활 주변에 어문을 그려넣기 시작한 것은 석기시대부터라고 짐작되는데, 이러한 습관은 당시의 어로생활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신석기시대 주거지에서 발견된 자갈에서 선각(線刻)한 최초의 어문을 볼 수 있다. 또, 청동기시대에는 암벽에 선각한 물고기 그림이 다양하게 나타나는데, 울산 울주군의 반구대암각화(盤龜臺巖刻畫)가 그 좋은 예이다.
삼국시대에는 금공장신구(金工裝身具)를 비롯하여 토우(土偶)들, 그리고 금은제(金銀製)의 몇몇 용기에 나타난다. 신라 토우에는 물고기를 비롯하여 게·개구리 등의 형상을 만들어 토기 뚜껑에 붙여 장식한 것이 있으며, 이들은 역시 주술적인 목적이 있을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 고분에서 출토된 금제 과대(銙帶)와 요패(腰佩)에는 어형계물(魚形繫物)이 달려 있는 것이 간혹 보이는데, 그 물고기 형상에는 점선으로 나타낸 타출비늘무늬가 새겨져 있다.
이러한 어패(魚佩)는 고려시대에도 사용되어 영관(令官)은 옥대(玉帶)에 물고기 형상을 패용하고, 국상(國相)과 근시관(近侍官)들 역시 물고기 형상을 패용하였다 한다. 그리고 서민들은 어형장식을 패용하지 못하는 대신 어문을 새긴 동경(銅鏡)이나 그릇을 사용하였다고 한다.
어형무늬 장식은 ‘부귀유여(富貴有餘)’라는 뜻을 지닌 것이니, 중국음으로 어(魚)와 여(餘)가 동음동성(同音同聲)이라는 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한다. 따라서, 어문이 도자기를 비롯하여 각종 공예 의장에 등장하고 결혼용품 등의 혼수와 의복 등에 물고기 수(繡)를 놓는 것은 부귀와 길경(吉慶)을 나타내며, 또 다손(多孫)을 의미한다고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