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비신 높이 267㎝, 너비 130㎝, 두께 24㎝. 화강암 석재로서 개석은 없고 비신의 상부를 좌우로 귀접이하였는데, 보존 상태는 좋은 편이다. 비문은 박의중(朴宜中)이 짓고 승려인 선진(旋軫)이 쓰고 또 전액도 하였으며, 국사의 문인인 중윤(中允)이 1393년(태조 2)에 세우고 혜공(惠公)이 각자(刻字)하였다.
비문에 국사의 이름은 찬영(粲英), 자는 고저(古樗), 호는 목암(木菴), 속성은 한씨, 양주 사람이고, 또 지감국사와 탑명인 혜월원명(慧月圓明)은 시호임을 밝히고 있다. 이밖에도 1328년(충숙왕 15)에 출생하여 14세에 수법하고 공민왕의 명으로 내원(內院)에 들어가 왕을 보살피고 우왕·창왕에게도 충성을 다하였으며, 1390년(공양왕 2) 63세로 입적할 때까지의 경력과 국사의 천부적 자질과 인품·학력 등을 기리는 내용이 실려 있다.
또한 음기(陰記: 비 뒤에 새긴 글)에는 국사의 문도들과 속인 문도들의 이름을 새겼다. 글씨는 당시 송설체가 유행할 때였으나, 그 영향은 전혀 보이지 않고 왕희지(王羲之)의 서법을 잘 체득한 것으로서 구양순(歐陽詢)과 우세남(虞世南)의 서법을 겸수한 듯한 느낌이 든다. 필력이 굳세고 결구도 잘된 작품이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송설체가 크게 유행하면서 점점 서풍(書風)이 변화되어 가는데, 이 비는 그 과도기의 것으로 고려시대의 여운이 남아 있는 마지막 글씨 중의 하나로 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