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씨효문청행록」은 조선 후기 작자 미상의 고전소설이다. 이 작품은 벌열가문(閥閱家門)에서 아이를 입양한 후 친자를 출생했을 때 일어나는 계후 갈등을 다루고 있다. 엄백진은 아내 최 부인이 아들을 낳지 못하자 엄백경의 둘째 아들 창을 양자로 들이게 된다. 이후 최씨 부인이 아들 영을 낳지만 창이 여전히 종손의 자리를 차지하자 최씨는 자신의 아들에게 적장자의 자리와 계후의 자리를 돌려 주기 위해 온갖 사건을 벌인다. 즉, 이 작품은 양자를 들인 후 친생자가 태어났을 경우 일어나는 종법 문제와 모자 간의 효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국문 필사본. 장서각본은 30권 30책이고,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본은 16권 16책이다. 장서각본은 완질이며, 고려대학교 도서관 소장본은 전16책 중 권1 · 4 · 5 · 15가 빠져 있다. 『금환재합연(金環再合緣)』으로 연결되는 연작 제1부로서, 가정소설과 가문소설의 유형이 혼재된 성격의 작품이다.
「명주보월빙(明珠寶月聘)」 · 「윤하정삼문취록(尹河鄭三門聚錄)」과의 연작 관계에 대한 관점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명주보월빙」의 연작 제3부로 보는 관점이다. 이는 「명주보월빙」의 연작인 「윤하정삼문취록」에 나오는 윤부의 처가 엄부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서사 양상에 주목한 관점이다.
둘째, 「명주보월빙」의 방계형(傍系型) 연작으로 보는 관점이다. 이는 연작이기는 하나 연작 전부(前部)의 중심 가문이 아닌 비중이 적었던 방계 가문을 중심으로 진행된 서사 양상에 주목한 관점이다.
셋째, 개별 작품으로 「금환재합연」에 이어지는 연작 1부 작품으로 보는 관점이다. 이는 「명주보월빙」의 연작인 「윤하정삼문취록」의 후속 세대 이야기가 아니라는 점에 주목한 관점이다. 현재 연구자에 따라 입장을 달리하고 있다.
송나라 때 엄씨 집안에 삼 형제가 있었다. 맏이는 태사 백진, 둘째는 추밀 백현, 막내는 오왕 백경이다. 백진은 부인 최씨가 늦도록 아들을 낳지 못하자, 동생 백경의 둘째 아들인 창을 양자로 삼는다. 백진은 도덕군자인 창의 효성과 덕행을 사랑하여 엄씨 문중의 가통을 잇게 하려고 마음먹는다.
그런데 최 부인이 얼마 후 아들 영을 낳는다. 최 부인은 창을 없애고, 영을 엄씨 가문의 종사로 삼을 음모를 꾸민다. 최 부인은 무당으로 하여금 후원에 창의 형상을 만들어 놓고, 활로 눈을 쏘고 칼로 머리를 베게 한다. 그러자 창이 시름시름 앓기 시작한다. 창이 거의 죽을 즈음 하늘에서 신장(神將)이 내려와 무당을 벤다. 무당이 죽자 저주 굿판은 끝나고 창도 건강을 회복한다.
창은 다시 기운을 차리고 진왕 윤광천의 딸과 혼인한다. 최 부인은 윤 부인이 아들을 낳기 전에 죽이려고 하나 번번이 실패한다. 최 부인의 소생 영은 모친과 달리 형 창을 따르며 잠시도 떨어지지 않는다. 최 부인은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영을 꾸짖지만, 영은 어머니의 음모를 알아차리고 형의 곁을 떠나지 않는다.
창은 20세가 되는 해에 과거에 장원 급제한다. 윤 부인이 아들을 낳자, 최 부인은 윤 부인이 남편과 동침한 일이 없는데 사내아이를 낳았다고 거짓으로 꾸며 정배(定配)를 보내는 데 성공한다. 최 부인은 다시 자객을 보내어 윤 부인을 죽이려 하지만 윤 부인의 동생이 그들을 쫓아 버린다.
최 부인은 또 창이 자신을 죽이려 했다고 거짓말을 해서 창을 정배를 보내고, 자객을 시켜 죽이려 한다. 그러나 자객은 창의 인물 됨됨이를 보고 그의 충복이 된다. 형을 지켜 주기 위해 따라와 있던 영은 자객이 가진 서한에서 어머니의 필적을 확인하고는 어머니의 죄를 몹시 한탄한다.
백진은 최 부인의 흉계로 미혼단(迷魂丹)을 먹고 시비를 분간하지 못하다가 점차 정신을 차린다. 하루는 백진이 문 밖에서 최 부인과 시녀가 주고받는 이야기를 듣고, 집안에 일어난 재앙의 원인이 최 부인에게 있음을 알게 된다.
백진은 창과 윤 부인을 돌아오게 하고, 최 부인과는 면대하려 하지 않는다. 창과 영이 어머니의 죄를 용서해 주기를 간청하자, 백진은 하는 수 없이 최 부인을 용서한다. 최 부인은 창과 영의 지극한 효성에 감동하여 비로소 과거의 잘못을 뉘우치고, 착한 어머니가 된다.
그 뒤 창은 이부상서에 임명되고, 영 또한 과거에 장원 급제한다. 창과 영은 친형제 이상으로 우애를 돈독히 하고, 양어머니와 친어머니에 대한 효도를 다하였다. 황제는 창을 효문선생(孝門先生), 영을 청행공(淸行公)으로 봉한다.
조선 후기의 장편소설 가운데에는 형제간의 우애를 앞세우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도 그러한 유형에 속한다. 주인공 엄창과 엄영은 사촌 간이지만, 창이 입양된 이후 태어난 영은 어머니가 형을 박해하는 것을 알고 형을 지켜 주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한다. 그러나 이 작품에서 문제를 삼는 것은 양자를 들인 후에 친생자가 태어났을 경우 정통론적 종법 의식과 혈통 위주의 종법 의식에 나타나는 갈등이다. 즉, 혈통 중심으로 종통(宗統)을 이으려 할 때 벌어지는 문제를 비롯해 당대 사대부 여인들의 겪는 고민과 현실적 문제를 보여 준다.
16세기까지 형에게 친생자가 없는 경우 동생의 둘째 아들이나 셋재 아들을 입양시켰고, 17세기부터는 동생의 맏아들이나 독자를 입양시키는 경우와 동생의 둘째 아들 · 셋째 아들을 입양시키는 경향이 공존하였다. 이후 18세기부터는 동생의 맏아들이나 독자를 입양시켰는데, 조선 후기로 갈수록 맏아들이 대를 잇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즉, 혈통보다 정통론에 입각한 종법 제도의 확립은 16세기에 나타나 17, 18세기에 점차 확대되는데 결국 이 작품은 친생자에게 가문의 후계자 지위를 넘겨주기 위한 혈통 위주의 종법보다는 정통론적 종법이 우위임을 보여 준다.
「엄씨효문청행록」과 비슷한 계후 갈등을 보여 주는 소설인 「성현공숙렬기」, 「완월회맹연」을 정통론적 종법을 따른 순서로 본다면, 동생의 둘째 아들을 양자로 삼고 파양 가능성이 언급된 「엄씨효문청행록」, 동생의 맏아들을 양자로 삼고 파양 가능성이 언급된 「성현공숙렬기」, 동생의 맏아들을 양자로 삼고 파양의 가능성이 없는 「완월회맹연」로 나열할 수 있다. 「성현공숙렬기」와 「완월회맹연」에는 양자인 계후자의 권리가 매우 크게 나타나는데, 「엄씨효문청행록」에서는 정통론이 완전히 자리잡지 않은 모습을 보여 준다.
이 작품은 형제 간의 우애뿐만 아니라 이들의 지극한 효심을 주제로 내세우고 있다. 엄창은 자신을 없애고자 하는 최 부인의 의도를 알면서도, 어머니의 실덕(失德)을 말하지 않고 두둔하며 늘 자신의 허물을 앞세운다. 결국 최 부인은 개과천선을 하게 되는데, 엄창의 지극한 효심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형에 대한 우애와 어머니 최 부인에 대한 효성 사이에 형을 보호하고 최 부인의 개과(改過)를 바랐던 엄영의 노력이 컸음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은 18세기 사대부 집안에서 가부장이 후사가 없을 경우 보편화된 입후 방식과 정통론적 종법 의식과 혈통 위주의 종법 의식에 생기는 갈등을 보여 준다. 결국 계후 문제에 있어 정통론적 종법주의가 관철되지만 그 과정에서 혈연으로 맺어진 모자 관계가 뚜렷하게 묘사되면서 정통론적 종법 질서와 혈통론적 가족 제도의 의식이 대립되면서도 공존하던 당대 현실을 반영하였다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