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초기에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상리(上里)인 마암(馬巖) 근처에 창건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그 뒤 홍문리에 중건하였으며, 이후부터 이 마을 주민의 희생자가 많아져 현재의 위치로 이건하였다.
현존하는 건물로는 5칸의 대성전, 8칸의 명륜당, 5칸의 동재(東齋), 내삼문(內三門), 각 8칸의 동무(東廡)와 서무(西廡) 등이 있다. 대성전에는 5성(五聖), 송조2현(宋朝二賢), 우리나라 18현(十八賢)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건축형태는 아래쪽에는 명륜당(明倫堂)과 교직사가 있고 윗 쪽에는 대성전(大成殿)과 동 · 서무가 위치한 전학후묘(前學後廟)의 형태이다. 대성전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익공계이고, 명륜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에 팔작지붕이다.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와 전적 · 노비 등을 지급받아 교관 1명이 정원 30명의 교생을 가르쳤으나, 조선 후기 이래 향교는 교육 기능이 쇠퇴하고 대신 선현에 대한 제향을 통한 교화 기능을 주로 담당하였다. 봄 · 가을에 석전(釋奠)을 봉행하며, 초하루 · 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이 향교는 1983년 경기도 문화재자료(현, 문화유산자료)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향교의 운영은 전교(典校) 1명과 장의(掌議) 수명이 담당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