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양(陳暘) 『악서(樂書)』 권62 「시훈의(詩訓義)」에 “옛날에 황제(黃帝)가 영윤(伶倫)에게 명령하여 해곡(嶰谷)의 대나무를 취해서 12율을 만들게 했으니, 악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러므로 후세에 악관을 영인(伶人)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런데 영(伶)의 의미는 ‘스스로 음악을 즐긴다’는 뜻이 아니라 ‘남의 명령을 받아 연주한다’는 뜻이다.”라고 한 것에서 보듯이 영관(伶官)은 음악을 스스로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음악을 업(業)으로 하는 자를 뜻한다.
고려와 조선에서 영관은 국역(國役)의 일종으로 음악을 하는 자를 두루 일컫는 용어였다. 실례로 『고려사(高麗史)』 권46에 “왕이 회암사에 행차하여 불사(佛事)를 크게 벌이고 1,000여 명에게 반승(飯僧)하고, 영관에게 향악과 당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라고 한 것을 들 수 있다.
조선 『성종실록(成宗實錄)』에 전악(典樂) 황효성이 제안한 제례아악 영신악 악보 개정을 상의하는 자리에서 대신들이 “한 영관의 말로 가볍게 옳고 그름을 의논할 수 없다”라고 주1 『순조실록(純祖實錄)』에 “종률(鍾律)이 어긋나면 영관이 잠언(箴言)을 올릴 수 있다.”, “예조판서가 여령(女伶)의 예행 연습을 직접 감독하는 일은 대종백(大宗伯)의 중책으로 영관의 일을 하는 것이니 주2라고 하였으니, 영관은 악사(樂師)와 악공을 두루 포함한다. 전악은 정6품의 체아직녹관(遞兒職祿官)으로 악사에서 뽑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려시대에 때로는 영관을 여느 악공과 구분하여 기량이 뛰어나 지도자 역할을 하는 악사(樂師)의 의미로 한정해서 쓰기도 하였다. 실례로 『고려사』 권67 왕태자원정동지수군관하의(王太子元正冬至受群官賀儀)와 왕태자절일수궁관하병회의(王太子節日受宮官賀竝會儀)에 각각 “영관과 악공이 먼저 자리로 나아간다.”, “영관이 양부(兩部)의 악공을 인솔하여 자리로 나아가고 영관 1명은 휘(麾)를 드는 자리로 간다.”라고 한 것을 들 수 있다.
한편, 영관(伶官)과 발음이 같지만 전혀 다른 용어인 「영관(永觀)」은 세종대[1418~1450]에 창제된 『정대업(定大業)』 중의 한 악곡을 가리키며, 현재 종묘제례악(宗廟祭禮樂)으로 연주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