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부고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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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궁중의 예식에서 임금의 거둥 때 수레의 앞을 따르며 음악을 연주하던 악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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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시대 궁중의 예식에서 임금의 거둥 때 수레의 앞을 따르며 음악을 연주하던 악대.
내용

전부고취는 어가(御駕)의 뒤를 따르며 행진음악을 연주하였던 후부고취(後部鼓吹)와 더불어 한 짝을 이루었다.

전부고취와 후부고취는 세종 때 이미 정비되었는데, 사직과 종묘에 친히 제사를 지내려 행차할 때의 행진의식을 갖춘 대가노부(大駕鹵簿)와 선농(先農)이나 석전(釋奠) 등의 제사를 친히 지내려 행차할 때의 행진의식을 갖춘 법가노부(法駕鹵簿)에서 포함되었다.

이러한 전부고취와 후부고취의 전통이 성종 때에 그대로 전승되어 『악학궤범』권2에 자세히 도설되었다. 전부고취와 후부고취의 악대편성은 [그림] 에서처럼 악사(樂師) 1인과 악공 50인으로 각각 편성되었다.

성종 당시에 전부고취나 후부고취는 왕이 가마[輿]를 타고 궁에서 나와서 가마에서 내려 연(輦)을 탄 뒤 행차할 때 음악을 연주하였고, 왕이 연에서 내려 입차(入次)할 때 급히 박을 쳐서 음악을 그쳤다. 환궁할 때에는 연에서 내려 가마를 타고 궁 안으로 들어가면 박을 급히 쳐서 음악을 그쳤다.

조선 전기에 확립되었던 전부고취와 후부고취의 전통은 조선 후기에도 전승되었는데, 『춘관통고(春官通考)』에 의하면, 전부고취와 후부고취가 악사 1인 및 악공 40인으로 편성되었다. 인조 이후에 그대로 전승된 정조 때의 전부고취 · 후부고취는 악기편성에 있어서 조선 전기의 것과 비교하면 〈표〉에서 보는 바와 같이 약간 변천되었다.

악기 · 의물 전기 후기
방향 1 -
교방고 1 1
당적 4 2
장고 4 2
퉁소 6 2
당비파 6 2
젓대 6 6
피리 6 4
1 1
맨손 8 14
메는 사람 6 -
홍양산 1 -
해금 - 2
서기 - 2
50 40
〈표〉 전부고취 악기편성 비교

참고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악학궤범(樂學軌範)』
『춘관통고(春官通考)』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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