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례악은 조선시대 회례에서 연행된 악가무이다. 격식을 갖춘 회례는 1433년(세종 15)부터 시작되었는데, 임금이 주관한 회례에서는 당악(唐樂)‧향악(鄕樂)과 함께 아악(雅樂)이 연주되고, 중궁(中宮)이 주관한 회례에서는 당악‧향악만 연주되었다. 세종 후기의 신악(新樂) 창제 이후 신악이 연향에 적극 권장되었으며, 늦어도 세조 대부터는 임금이 주관한 회례에서도 아악을 쓰지 않게 되었다. 그 결과, 세조 대 이후 임금과 중궁이 주관한 회례에서는 모두 당악‧향악‧신악과 같은 속악(俗樂)만 연주하게 되었다.
회례(會禮)는 조선시대에 임금이 외정전(外正殿)에서 왕세자와 종친(宗親)‧문무백관(文武百官)[^1]과 함께 화합을 도모하고, 주2이 내정전(內正殿)에서 왕세자빈 및 내명부(內命婦)‧ 외명부(外命婦)와 함께 화합을 다지는 의례이다. 술과 음식 및 춤과 음악이 수반되므로 회례연(會禮宴)이라고도 한다. 대개 1년에 1차례, 주3가 처음 싹트는 동지(冬至)나 한 해가 시작하는 정조(正朝, 설날)에 주4를 마친 후 베풀었다. 중궁 또는 왕세자를 책봉하고 나서는 특별히 더 베풀기도 하였고, 국상(國喪)이나 주5이 있으면 아예 베풀지 않기도 하였다. 한편, 주6는 중국 사신이 왔을 때 행하는 의례로, 회례(會禮)와 한자음이 같지만 전혀 별개이다.
격식을 갖추어 베푼 회례는 1433년(세종 15)부터 시작되었다. 임금이 주관한 회례에서 당악‧ 향악과 함께 아악이 연주되고, 중궁이 주관한 회례에서는 당악‧향악만 연주되었다. 세종 대에 임금이 주관한 회례의 의식 절차와 악가무는 다음과 같다.
절차 | 음악 | 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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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 나옴 | 헌가(軒架) │ 융안지악(隆安之樂) | |
왕세자 배례(拜禮) | 헌가 │서안지악(舒安之樂) | |
왕세자가 제1작(爵) 올림 | 헌가 │ 휴안지악(休安之樂) | |
백관(百官) 배례 | 헌가 │서안지악 | |
영의정(領議政)이 제2작 올림 | 헌가 │ 휴안지악 | |
진안(進案) | 헌가 │ 휴안지악 | |
진식(進食) | 헌가 │ 수보록지악(受寶籙之樂) | |
제3작 | 등가 │ 문명지곡(文明之曲) | 문무(文舞) |
진식 | 헌가 │ 근천정지악(覲天庭之樂) | |
제4작 | 등가 │ 하황은지악(荷皇恩之樂) | |
진식 | 헌가 │ 수명명지악(受明命之樂) | |
제5작 | 헌가 │ 무열지악(武烈之樂) | 무무(武舞) |
진식 | │서자고지악(瑞鷓鴣之樂) | |
제6작 | 몽금척(夢金尺) | |
진식 | │수룡음지악(水龍吟之樂) | |
제7작 | 오양선(五羊仙) | |
진식 | │황하청지악(黃河淸之樂) | |
제8작 | 아박 | |
진식 | │만년환지악(萬年歡之樂) | |
제9작 | 무고(舞鼓) | |
진대선(進大膳) | │태평년지악(太平年之樂) | |
│정동방지곡(靖東方之曲) | ||
배례 | 헌가 │서안지악 | |
임금 들어감 | 헌가 │융안지악 | |
임금의 출입, 왕세자‧백관의 배례 및 제1작~제5작의 절차에 연주된 「융안지악」‧「서안지악」‧「휴안지악」‧「수보록지악」‧「문명지곡」‧「근천정지악」‧「하황은지악」‧「수명명지악」‧「무열지악」은 회례에 처음으로 연주된 아악이란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이는 1430년(세종 12) 윤12월에 완성된 『세종실록(世宗實錄)』 「조회아악보」에 따라 만든 음악으로서, 주11의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 「풍아십이시보(風雅十二詩譜)」를 바탕으로 하였지만, 조선의 음악적 가치관에 따라 기존 선율을 재구성한 것이므로, 당시에 신제 아악(新制雅樂)으로 불렸다.
임금의 출입에 연주된 「융안지악」과 배례에 연주된 「서안지악」은 달에 상관없이 언제나 각각 주12과 주13으로 연주했다. 반면, 술과 음식을 들 때 연주된 「휴안지악」에서 「무열지악」까지의 아악은 동지에는 11월에 해당하는 황종궁으로 연주하고, 설날에는 1월에 해당하는 주14으로 연주하였다. 이를 달에 따라 악조를 쓴다고 하여 주15이라 한다.
제5작 이후의 진식에서 진대선까지의 절차에 연주된 「서자고지악」‧「수룡음지악」‧「황하청지악」‧「만년환지악」‧「태평년지악」‧「오양선지기(五羊仙之伎)」는 중국에서 고려에 전래하여 조선에까지 전승된 당악( 정재(呈才) 포함)이다. 「아박지기(牙拍之伎)」와 「무고지기(舞鼓之伎)」는 고려에서 전래한 향악이다. 「몽금척지기(夢金尺之伎)」는 당악을 바탕으로 조선에서 새로 구성한 당악정재(唐樂呈才)이다. 「정동방지곡」은 고려의 「서경별곡(西京別曲)」을 바탕으로 조선에서 새로 구성한 향악이다.
세종 후기에 『정대업(定大業)』‧ 『보태평(保太平)』‧ 『봉래의(鳳來儀)』와 같은 신악(新樂)이 창제되면서 연향에서 쓰도록 적극 권장되었다. 늦어도 세조 대(1455~1468년)부터 임금이 주관한 회례에 아악을 더 이상 쓰지 않게 됨에 따라 중궁 회례연과 마찬가지로 당악‧향악‧신악과 같은 속악만 연주하게 되었다.
선조 대(1567~1608년) 이후로 동지 또는 설날에 회례연을 베풀지 않게 되면서, 회례연은 역사의 무대에서 거의 사라졌다. 실록에는 1602년(선조 35) 7월의 중궁 책봉과 관련하여 중궁과 명부(命婦)와의 회례연을 준비했고, 1651년(효종 2) 왕세자 가례(嘉禮)와 관련하여 회례연 논의를 하였으며, 1894년(고종 31) 2월 8일에 왕세자 망삼(望三) 생신을 기념하여 회례연을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