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7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비신 높이 2.77m, 너비 1.14m. 944년(혜종 1)에 건립된 이 비의 형식은 귀부(龜趺) 위에 비신을 세우고 그 위에 이수(螭首)로 덮은, 신라 · 고려의 전형적인 석비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는데, 비신 일부에 약간의 손상이 있을 뿐 완전한 형태로 남아 보존상태가 매우 좋다. 자경은 2.5㎝로 최언위(崔彦撝)가 지은 내용을 최윤(崔潤)이 쓰고 전액도 하였으며, 각자는 최환규(崔奐規)가 맡았다.
통일신라의 국사인 징효(澄曉)의 휘는 절중(折中)이고 휴암(鵂嵓, 현재의 황해도 봉산군) 사람이다. 자와 속성은 비문의 마멸로 알 수 없다. 이밖에도 비문에는 징효의 가계, 826년(흥덕왕 1)에 진전법사(珍傳法師)를 사사하고 19세에 장곡사(長谷寺)에서 구족계를 받아 탁월한 총명으로 수행하고 교화한 것, 75세 때인 901년(효공왕 5)에 입좌하여 입멸하였음을 기록하였다. 또 효공왕이 징효대사와 보인(寶印)이라는 탑명을 증시(贈諡)한 것 등을 적고, 말미에 대사의 공덕을 기리는 명문을 새겼다.
이 비는 통일신라의 징효대사를 기리는 탑비이지만 국가가 바뀌는 어지러움 때문에 이미 지었던 것을 나중에 새겨서 세운 것으로 추측된다. 글씨는 통일신라와 고려 초에 유행한 초당의 필법으로 구양순풍(歐陽詢風)으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