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4년(문자명왕 13) 4월 사신으로 북위(北魏)에 파견되어 효문제(孝文帝)를 동당(東堂)에서 만났다.
이때 그는 “소국(小國)이 제정(帝庭)에 정성스런 마음으로 여러 대에 걸쳐 땅에서 나는 생산물로 조공을 어긴 일이 없었다. 다만, 황금은 부여에서, 가옥(珂玉)은 섭라(涉羅 : 지금의 제주도)에서 산출되고 있지만, 부여는 물길(勿吉)에게 쫓기고 섭라는 백제에 병합되었다. 이 두 특산물이 북위 조정에 등장하지 못한 이유는 물길과 백제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은 과장이거나 변명일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그가 북위에 오기 6년 전 백제 동성왕에 의하여 제주도가 복속되었으므로 단순한 변명으로 볼 수만도 없을 것 같다.
가옥은 바다에서 생산되는 패류(貝類)로 말재갈 장식에 쓰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고구려가 가옥을 종래 제주도에서 수입하고 있었을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때 효문제는 고구려가 부여와 섭라지역을 회복하여 특산물의 조공이 항시 있기를 그에게 당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