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직은 사사(士師)였다. 사사를 군통솔자 또는 재판관이라고도 하지만, 토지와 민사(民事)를 맡아보았던 사공(司空)의 이칭인 것 같다. 그는 본디 하후씨(夏后氏)의 13세손 조명(祖明)의 후예이다.
조명은 유루(劉累)와 더불어 요룡(擾龍)에서 수학하였는데, 유루가 도망하자 조명도 함께 동해 가운데 해가 뜨는 근원지인 평양으로 피해와서 살았다.
그런데 기자(箕子)가 동쪽으로 와서 팔조지교(八條之敎 : 사회질서 유지를 위하여 기자가 만들었다는 8개조의 금법)를 베풀게 되었는데, 나랏사람들이 그를 천거하여 ‘사사’로 삼았으므로 주자(胄子 : 왕부터 경·대부에 이르기까지 지배층의 대를 잇는 적장자)를 가르치고 백성을 교화하며 좋은 풍속을 이루었다.
그 공을 기자가 가상히 여겨 왕씨성(王氏姓)을 내려주었다. 이는 대개 그가 살고 있는 곳이 해가 떠오르는 땅이므로 흙 ‘토(土)’자에다 방점(傍點)을 올려서 가로로 길게 그은 것이다. 그의 57세손인 왕렴(王廉)은 기준왕(箕準王) 때 주국(柱國)이 되었다.
그밖의 후손들 중 신라왕의 신하가 된 인물도 있었다. 그러나 이 같은 기록에 대한 신빙성에는 의문의 여지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