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는 나절로. 출생지는 서울. 1919년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임시정부의 청년당원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고, 1923년 상해 혜령전문학교(惠靈專門學校)를 졸업하였다. 초라한 등사기 한 대를 가지고 혼자 독립운동의 울분을 토하는 임시정부의 신문을 발행하였다.
고독한 문학청년으로서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다.”는 루소(Rousseau, J. J.)의 자연주의의 신봉자인 그는, 그러한 성품과 가치관 때문에 당시 저명한 한글학자인 선배로부터 ‘나혼자’라는 뜻의 ‘나’와 자연 그대로라는 의미의 ‘절로’라는 우리말이 합성된 ‘나절로’라는 호를 선사받기도 하였다.
1931년 귀국하여 『중앙일보』·『조선일보』·『매일신보』 등의 기자로 일하다가 1947년 경향신문사에 입사, 편집부장 겸 편집국 차장을 지내다 곧 편집국장이 되었다.
1948년 정부수립 후 이범석(李範奭) 내각이 조직될 무렵 무게 없는 각료의 이 얼굴 저 얼굴들이 마음에 들지 않자 「李承晩대통령에 逆耳의 일언」이라는 제목으로 5회에 걸쳐 논설을 집필하였다.
부제(副題)가 ‘친일파·민족반역자·모리배 문제에 대하여’였던 이 글은 이승만 대통령에게 충고하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초대 이범석내각의 해부」라는 연속 논평을 쓰다가 4회째에 게재가 거부되었다.
이 글은 3회까지 이범석 총리(국방부장관 겸임)를 비롯하여 외무부장관 장택상(張澤相), 내무부장관 윤치영(尹致映) 등의 인물평이었고 4회째는 상공부장관 임영신편(任永信篇)이었는데 이범석 총리의 지시로 명동성당을 통해서 게재중지 명령이 내려진 것이었다.
1949년『시사신문』 주필 겸 편집국장, 『서울신문』편집국장 겸 논설위원을 거쳐, 1952년 『조선일보』논설위원, 『평화신문』 논설위원을 지낸 다음 1963년 『국도신문』 주필이 되었다.
1954년에서 1966년까지 『동아일보』 논설위원·편집국장·편집고문·이사 겸 논설위원실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1966년 국제신문인협회(IPI) 회원, 1967년 한국신문편집인협회 명예회원이 되었다. 저서로는 『신문독본』·『나절로독본』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