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광법사 설화」는 신라 고승 원광법사의 영이(靈異)를 다룬 불교설화이다. 원광법사가 고승이 되기까지의 신이한 이야기와 함께 백성들에게 세속오계를 가르쳐 신라의 불교를 호국 불교로 이념화한 내용을 담고 있다. 원광법사에 관한 영험담은 토착 신앙과 불교 간 갈등과 복속의 과정이 형상화되었다고 평가된다.
『삼국유사(三國遺事)』 권 4 「원광서학(圓光西學)」에 5편의 설화가 실려 있으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진(陳)나라 말기에 원광(圓光)이 수(隋)나라 난병(亂兵)에게 잡혀 죽을 뻔하였으나, 절과 탑의 불타는 형상이 대장에게 나타나 구해 주었다(『당속고승전(唐續高僧傳)』 권 13).
② 원광이 임종할 때 공중에 음악 소리가 가득하고 이상한 향기가 절 안에 가득 찼다. 어떤 속인(俗人)이 원광의 무덤 옆에 죽은 아이의 태(胎)를 묻었더니 벼락이 쳐서 태가 무덤 밖으로 내던져졌다(『당속고승전』 권 13).
③ 신라 왕이 병이 들어 차도가 없었는데, 원광을 청하여 참회(懺悔)의 계(戒)를 받고 그를 신봉하였다. 원광의 머리가 금빛으로 빛나고 태양의 모양이 그를 따름을 보고 왕이 그를 더욱 신봉하였고, 오래지 않아 왕의 병이 나았다(『당속고승전』 권 13).
④ 원광이 30세에 삼기산(三岐山)에 들어가 수도할 때 이웃에 중 하나가 와서 살았는데, 밤에 신(神)이 원광에게 나타나 그 중더러 다른 곳으로 옮겨 가도록 권해 주기를 당부하였다. 그러나 중은 호귀(狐鬼) 따위의 말이라 하여 듣지 않았다. 그러자 신이 벼락을 내려 산을 허물어 중이 있던 절을 묻어 버렸다. 그후 원광은 신이 권유한 대로 중국에 가서 불교와 유교를 익히고 돌아왔다. 신에게 감사하러 삼기산에 간 원광은 신으로부터 계를 받고 생생상제(生生相濟)의 약속을 맺었다. 신은 원광의 청으로 자신의 모습을 드러냈는데, 큰 팔뚝이 날이 밝아 오는 아침 구름을 뚫고 하늘가에 닿아 있었다. 신은 마침내 무상(無常)의 몸을 버렸는데, 원광이 보니 늙은 여우였다(『古本殊異傳』).
⑤ 신라 사량부(沙梁部)에 사는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 원광에게 와서, 평생의 경계가 될 말을 들려주기를 청하였다. 원광은 두 사람에게 세속오계(世俗五戒)를 가르쳐 주었다. 즉, 임금을 충성으로 섬김[事君以忠], 어버이를 효성으로 섬김[事親以孝], 벗을 신의로 사귐[交友以信], 싸움에서 물러서지 않음[臨戰無退], 산 것을 가려서 죽임[殺生有擇] 등의 내용이었다. 원광은 "산 것을 가려서 죽인다."라는 뜻을 깨치지 못하는 귀산과 추항에게 산 것을 죽일 때 육재일(六齋日)과 봄 · 여름을 피하는 것은 시기를 가리는 것이라 알려주고, 말 · 소 · 닭 · 개와 같은 가축과 작은 물건을 죽이지 않는 것은 물건을 가리는 것이며, 이것도 쓸 만큼만 죽인다고 알려주었다. 두 사람은 원광의 가르침을 받들어 실천하기로 다짐하고, 그 뒤 전쟁에 나가 모두 나라에 큰 공을 세웠다(『삼국사기』 「열전」).
불교설화에는 신이적(神異的)인 내용을 통해 독자나 청자에게 깊은 종교적 감동을 주는 것이 있다. 불교설화는 여러 가지 신력(神力)으로 중생이 미증유(未曾有)의 일을 겪게 하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 이는 중생을 교화(敎化)하는 하나의 방편이다.
원광에 관한 5편의 설화에서 앞의 4편은 불교적 영이담(靈異譚, 영험하고 신이한 이야기)이다. 이와 같은 영험담은 종교 설화의 본령(本領)이라 할 수 있다. 원광의 이웃에 있던 승려의 죽음이나 원광을 이끌어 주었던 신의 죽음이 모두 등장한다는 점에서 토착 신앙과 불교 간 대결을 보여 주며, 신의 최후가 죽어 가는 검은 여우이고, 원광법사는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고승이 된다는 점에서 마침내 불교 앞에 하락 · 복속되는 토착 신앙의 모습을 반영한 것으로도 해석된다.
⑤는 이른바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이야기화한 것으로, 이는 당초 보살십계(菩薩十戒)에 근거를 두고 세속에 맞도록 절충한 것이다. 이는 불교의 살생계(殺生戒)가 신라의 현실에 알맞게 "산 것을 가려서 죽임[殺生有擇]."으로 변용된 모습을 보여주며, 신라의 불교가 호국불교(護國佛敎)로 이념화되었음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