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자생손지지설화」는 조선 후기를 배경으로 죽은 자식의 묘를 명당에 써서 자손을 얻는다는 내용의 설화이다. 죽은 자식을 명당에 묻으면 그 영혼이 처녀를 임신시켜 자손을 볼 수 있다는 풍수 관련 이야기로, 대를 잇고 귀한 후손을 얻고자 하는 욕망과 명당에 대한 믿음을 보여 주고 있다.
사자득손(死子得孫) 또는 고목생화(枯木生花)설화라고도 한다.
죽은 나무에서 다시 꽃이 피듯이, 다 망한 집안에서 나온 자손이 가문을 일으켜 후손이 번성하고, 그 지위가 높아지며 귀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고목생화’라는 말이 이 설화에서 유래했다.
이 설화는 전국적인 분포를 보이고 있는데, 각편에 따라 현풍 곽씨 · 평산 신씨 · 해주 오씨 · 회덕 송씨 · 청송 양씨 등 특정 가문의 이야기로 채록되기도 한다.
한 스님이 인심 좋은 진사(進士)의 집에 동냥하러 왔다가, 진사의 집에서 대접을 잘 받았다. 진사는 미혼으로 죽은 외동아들의 시신을 장사 지내지도 않고 집에 두고 있었다. 스님이 상심한 진사에게, 죽은 아들로 손자를 볼 수 있는 무덤 자리를 소개해 주고, 여기에 시신과 함께 가문을 표시하는 신물(信物)을 무덤에 넣게 한다. 그 뒤 새로 부임하는 사또 일행이 그 무덤이 있는 곳을 지나다가, 사또 딸이 소변을 보거나 비를 피하고자 그곳에 잠시 머물게 되었다. 이때 사또 딸은 총각의 혼령과 접하여 임신하게 된다. 사또는 딸이 임신하자 분노했다. 그러나 사또의 딸은 무덤 옆에서 있었던 신이한 일 외에는 부정한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고 당당하게 말하며 징표를 제시했다. 사또는 딸이 아들을 낳자, 잔치를 열어 신물을 통해 손자의 할아버지인 진사를 찾게 된다. 사또의 딸은 진사의 며느리가 되어 아들을 데리고 그 집으로 갔다.
「사자생손지지설화」는 입에서 입으로 광범위하고 활발하게 전승되었으며, 『한국구비문학대계(韓國口碑文學大系)』에는 「사자생손지지설화」가 30편 정도 실려 있다. 죽은 자식으로부터 자손을 얻게 되는[死子生孫] 명당(明堂)은 주로 대로변, 길의 복판, 주막 등 사람들의 왕래가 잦거나 쉬어가는 곳이었다. 평토장(平土葬) 대신 정자를 지었다가, 진사의 딸이 그 정자에 쉬러 들어갔다가 혼령과 관계를 맺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대개 무덤이 갈라지거나 혼령이 직접 나타나 여인을 겁간(劫姦)하는데, 때로 손이 쑥 들어오거나 신물인 칼을 주운 예도 있다.
총각의 무덤에 넣은 신물은 칼이나 족보 · 가락지 등으로 나타난다. 아무것도 모르는 처녀가 불쌍하다는 설명을 덧붙이는 각편들도 있고, 여인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임신하여 과부가 된 상황에 분개하여 스님(죽은 자식의 무덤 자리를 소개해 준 스님)이나 시아버지(여인을 임신하게 만든 혼령의 아버지)에게 칼부림하는 각편들도 있다.
신이담(神異譚)에 속하며, 씨족 설화에서 훨씬 후대에 내려와 생긴 중시조설화(中始祖說話)라 할 수 있다. 스님 · 풍수와 같은 이인(異人)의 등장이나 영교 · 신물 · 이상 출생 등 많은 상징 대목에서 신화적 잔재를 찾을 수 있다.
이 설화는 장수(長壽) · 부(富) · 귀(貴) · 다남(多男), 즉 후손을 중하게 여기는 한국인의 행복관과 그것을 명당에 의존하고자 하는 강한 풍수 사상이 나타나 있다. 그중에서도 가문의 대를 잇는 후손을 귀하게 여기고 있으며, 어떠한 수단을 쓰더라도 가문의 대를 이으려는 강한 혈연 의식이 나타나 있다.
아들이 미혼으로 죽자, 아버지가 아들의 시체를 묻지도 않고 대를 끊은 불효자라며 매질하거나 자손을 보기 위해 처녀를 임신시키고 과부로 살게 하는 등 부계 혈연 중심의 가계 계승에 대한 집착과 강박감을 드러낸다. 이처럼 풍수설화(風水說話)는 가부장제(家父長制)의 부계 혈연 지속을 목적으로 남성 중심의 욕망과 실현을 담고 있다. 하지만 문제에 직면한 여성이 적극적이고 현실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는 점에서, 남성주의의 새로운 대안이 여성적 힘에 있지 않은지 생각하게 하거나, 타인을 희생해 가면서 받은 궁극적인 복이 결국 미혼모와 사생아의 제도권 내 편입이라는 점에서 욕망에 대한 반성과 함께 당대의 사회문화적 의의를 새롭게 찾아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