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9년 강원도 원주에서 출생했다. 호는 범석(凡石)이며 원세형(元世亨)의 아들이다. 충청북도 참여관을 지낸 원은상, 중추원 참의를 지낸 원덕상, 군수를 지낸 원훈상 등은 모두 그의 동생이다.1895년 9월 관비유학생으로 도일했다. 도쿄의 게이오의숙(慶應義塾) 보통과를 졸업하고 게이오의숙 이재과에 입학해 1896년 12월 졸업했다. 이어 도쿄법학원 법과 야간반을 다니면서 일본은행에서 실무견습을 거친 뒤 1900년 7월에 귀국했다.
1902년 탁지부 주사에 임명되었으나 4개월 만에 사직했다. 다시 탁지부와 중추원 관직에 임명, 1903년에 다시 외부 번역관으로 관직에 오른 뒤, 12월 중추원 의관에 선임되었으나 바로 사직했다. 이후 1904년 7월 외부 참서관, 1906년 1월 의정부 참서관을 거쳐 1907년 6월 탁지부 사세국장과 수도국장을 지냈다. 1905년 6월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일본에 축하 편지를 보냈다. 1908년 1월 탁지부 사계국장과국유삼림산야처분심사회 위원을 겸임했다, 이해 2월 대동학회 회원, 5월 대한학회 발기인, 8월 기호흥학회 찬무원으로 참여했으며, 1910년 대한흥학회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일제강점 이후 전라남도 참여관으로 봉직하면서 친일관료가 되어 전라남도 지방토지조사위원회 임시위원, 강원도 도장관, 강원도 지사, 전라남도 지사,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했다. 전라남도 지사 재직 시 전남 유림의 친일화를 목적으로 결성된 전라남도 유도창명회의 설립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1924년에는 조선경찰협회 전라남도지부장을 겸임했으며, 1926년부터 '아세아 민족의 결합, 내선 융화, 사상 선도'를 목적으로 조직된 동민회(同民會)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1928년 9월 교토에서 열린 쇼와(昭和) 천황 즉위식에 참석했으며, 그해 10월 조선박람회협찬회 상담역, 1929년 5월 조선박람회 평의원을 지냈다. 1930년 12월 수양단 조선연합본부 찬조원을 맡았다. 1933년 2월 우카키 조선총독의 특명을 받아 ‘중추원 참의 위문단’ 대표단의 일원으로 선발되어 만주에 파견중인 일본군을 위문하고 재만한인의 생활 상황과 전선의 자력갱생운동 실정을 시찰하고 돌아왔다. 1933년 7월 중추원 시정연구회 경제부 주사위원, 1936년 10월 조선산업조사위원회 위원에 선임되었다. 1938년 조선방공협회가 창립되자 경기도연합지부 평의원, 1939년 11월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으로 활동했다. 일본정부로부터 1912년 8월 한국병합기념장, 1915년 11월 다이쇼(大正)대례기념장, 1920년 8월 훈4등 서보장을 받았다. 해방 후에는 전라남도 지사 고문을 맡았다가 임시로 부지사를 맡기도 했다. 1958년 8월 20일 사망했다.
원응상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9·19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0: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328∼342)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