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유치원은 1900년대 주로 미국 개신교 선교사가 발행한 Korea Mission Field에서 관련 내용들을 확인할 수 있다. 1897년에 설립된 부산유치원, 1913년에 설립된 경성유치원은 조선의 일본 거류민 자녀들을 위한 유치원이므로 한국인유치원은 1900년대 교회 중심으로 운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유치원은 1910년대 후반 이후 본격적으로 설립 · 운영되는데 여기에는 두 가지 원인이 작동하였다.
첫 번째 이유는 일제 당국은 “종(宗)‧교(敎) 분리주의”와 “교원자격의 강화”를 골자로 하는 「개정사립학교규칙」을 1915년 3월에 발표하는데, 이 규칙으로 학교에서 종교교육을 제약받게 되자, 유치원이 이 규칙의 적용을 받지 않아도 되는 교육공간으로 인식하기 시작하면서이다.
두 번째 이유는 “신도수 증가의 실패”이다. 자급자족 원칙에 따라 운영되었던 한국교회는 1910년을 기점으로 신도수 증가가 둔화하면서 운영의 어려움에 직면하게 되고, 이는 선교 대상을 수정하는 계기가 된다. 1920년대 이후 교회에서 ‘유년주일학교’ ‘하기(夏期)아동성경학교’ ‘아동성경구락부’등 아동을 위한 종교교육이 크게 활성화되었는데 유치원의 증가도 이러한 맥락에서 해석된다. 요컨대, 제도권 학교에서 종교교육을 제약받게 되고 침체된 선교 활동의 대응책으로, 개신교는 ‘유치원사업’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1920년대 전국에 유치원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로 널리 설립되었는데, 일제의 별 규제 없이 미 · 비인가로 교회 내에 설치‧운영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1930년대 유치원은 미국의 세계대공황 여파로 미국 선교본부의 지원금 삭감‧중단이란 큰 위기에 놓였지만, 한국인 독지가나 유지들이 인수 또는 계를 조직해서 부활시켜 나갔다. 『조선제학교일람(朝鮮諸學校一覽)』에 의하면, 1933년 272개 유치원이 1943년 343개로 증가했고, 원아수는 10,268명에서 21,471명으로 증가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유치원을 다닌 아동은 극히 소수였다. 보통학교 입학생수와 비교해 보면 확연히 알 수 있다. 1942년 보통학교에 입학한 학생은 약 1,752,590명이었다면, 유치원을 다닌 학생은 21,471명에 그쳤다. 당시 희소성 높은 유치원생들은 다름 아닌, 중산층 가정의 자녀들이었다. 부모들은 주로 상인, 신문기자, 의사, 귀족, 회사원 등 근대적 직업군의 유산자(有産者)들이었다. 이들은 새로운 근대문물에 개방적이어서 아들뿐 아니라 딸도 “차별하지 않고” 유치원을 보냈다. 1937년 기준으로 보통학교와 유치원 학생의 성별 비율을 비교해 보면, 보통학교는 남아 대 여아 비율이 100:43.7이고, 유치원은 100:89.9였다.
보통학교에 입학할 때는 주로 구술고사와 서류검사를 거쳤는데 유치원에서 조기교육을 받았던 학생이 유리했다고 한다. 다시 말해서 아들, 딸을 차별하지 않고 어렸을 때부터 ‘남다른’ 교육을 받도록 하고 더 나아가 조기교육이 향후 자녀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근대적인 사고를 유산자 가정의 일부 부모들은 유치원을 통해 실천하고 있었다.
당시 인가받은 유치원들은 “일시동인(一視同仁)과 내선융화(內鮮融和)”, “국민교육의 기초를 위해” 등 일제의 기본적인 교육방침을 따랐다. 일례로, 내선일체형 비종교 유치원이었던 ‘애국유치원’의 주된 교육은 일본어[국어]였다. 내선일체형 유치원은 일제 군국주의 말기에 가서 그 성격이 극명하게 드러나는데 유치원 내에 신전과 궁성 사진을 마련해 놓고 그 앞에 원아뿐 아니라 부모들도 절을 하도록 하는 ‘황국신민화 교육’을 수행하였다. 몇몇 유치원을 제외한 대다수 유치원은 재정난에 허덕였는데 열악한 여건 속에서도 유지‧존속될 수 있었던 것은 각종 원아들의 잦은 행사를 통한 모금과 재정지원을 지속적으로 한 ‘자모회(姉母會)’가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해방 후 유치원의 첫 행정적 조치는 1946년에 소집된 미군정의 한국교육위원회의 제2분과[교육제도 분과위원회]에서 결정되었다. 유치원은 학령전 교육이란 이름으로 포함되었지만 기간학제에는 빠졌다. 1949년 「교육법」 제정 때도 유치원은 학교의 일종으로 명시되었지만, 순서상 초등학교 이전 교육기관 단계로 자리매김하지 못하는 등 위상은 불분명했다. 1969년에 제1차 유치원교육과정을 제정 · 공포하고, 1970년대에는 국무총리 산하종합교육심의회에서 마련한 “장기 종합 교육계획안[1972년~1986년]”에 유아교육발전 시안을 포함하는 등 일부 정책적 노력은 있었으나, 이때까지 유아교육은 정부의 중요한 교육정책은 아니었다.
정부가 본격적으로 유아교육 정책을 추진하게 된 시기는 1982년 「유아교육진흥법」 제정부터라 하겠다. 1982년~1986년 동안 유아교육 예산은 26억원에서 121억원으로 증액되었고, 1980년 7.3%에 불과했던 취원율이 약 55%로 약 8배가 상승하였다.
1991년에 다시 전기를 맞이하게 되는데 「교육법」에 의한 유치원, 「유아교육진흥법」에 의한 새마을유아원, 「영유아보육법」에 의한 보육시설로 구분되었다. 「교육법」을 개정하면서 유치원의 목적을 ‘보육’에서 ‘교육’으로 변경하였고, 입학 연령을 만4세에서 만3세로 낮추었다.
1922년 「조선교육령」부터 해방 이후 「교육법」, 「유아교육진흥법」 등에서 유치원은 “보육” 기관으로 규정해 왔는데 1991년 「교육법 」개정을 기점으로 “교육”기관으로 성격을 변경하였다. 유치원은 교육기관, 어린이집은 보육기관이란 이원화 체계를 확립하는 계기가 되었고, 오늘날 유치원과 어린이집[보육시설]의 일원화라는 유보통합을 추진하게 된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유아교육과 보육의 통합적 정책연구를 위해 2005년 12월 육아정책개발센터[현, 육아정책연구소] 설립, 2012년부터 유치원과 어린이집의 공통과정인 누리과정을 실시하고 있다. 2013년에 추진한 3단계 유보통합은 실질적 성과 없이 끝났다. 교육부는 2023년 1월 30일 ‘출생부터 국민안심 책임교육 · 돌봄’ 실현을 위한 「유보통합추진방안」을 발표, 유보 통합을 재추진 중이다.
2022년 기준 전국의 8,562개 유치원에 552,812명 유아들이 재원하고 있다. 초저출산이 장기화되면서 전체 유치원수는 감소 추세지만, 세부적으로는 공립유치원 증가, 사립유치원 감소라는 상반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원아수와 학급수는 사립유치원이 공립유치원보다 훨씬 많다. 공립유치원은 주로 농산어촌 중심으로 소규모로 설립했지만, 사립유치원은 도시 중심의 대규모로 설립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유치원의 성격은 복음주의 기관이자 유산자 가정의 상급학교 진학을 위한 조기교육기관이라 할 수 있다. 당시 상급학교로의 진학은 식민지 체제의 암묵적 순응 또는 협력의 행위로 해석될 수 있으며, 선교사의 복음주의 활동이 한국민족의 독립과 같은 민족주의와는 거리가 있다는 점에서 기존의 일제강점기의 유치원을 민족교육기관이자 서민교육기관으로 해석한 연구는 재검토되어야 하겠다.
유치원의 위상은 일제강점기에는 고등여학교의 부속교육기관으로, 미군정 시기에는 학령전 교육기관이지만 기간학제에는 포함되지 못하는 등 위상이 불분명했다. 오랜 시간 유치원이 주요 교육정책에 포함되지 못하면서 사립[사인]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2000년대 이후 유아교육의 공교육화 정책이 본격화되면서 공립유치원이 증설되었고, 현재는 양적으로 공립유치원이 사립유치원보다 많지만, 재원아수는 사립유치원이 더 많다. 이러한 유치원의 구조는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사립[사인] 중심으로 발전해 오다가, 국가 교육정책의 틀 안으로 점점 들어오면서 재구조화되는 과정으로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