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경남도 출신. 이명은 윤죽보(尹竹甫)·윤병용(尹秉庸)·박시빈(朴時彬)·박병용(朴秉用).
1919년 3월 함경남도 홍원에서 3·1운동에 참여했다가 검거를 우려해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 후 장백현(長白縣) 지역에 근거를 둔 대한독립군비단(大韓獨立軍備團)에 입단하고, 1920년부터 1921년까지 동단의 재무부장, 16도구(道溝) 신창동(新昌洞)의 통신사무국 대리, 총단장(總團長) 등으로 활동하였다.
1921년 7월에는 태극단(太極團)·대진단(大震團)·흥업지단(興業支團)·광복지단(光復支團) 대표들과 군사·외교·행정·교육 문제를 논의하였다.
1922년 2월에는 군비단 대표인 강건·김용대(金容大), 흥업단 대표인 김호(金虎)·석기만(石基萬)·이한평(李漢平) 등과 협의, 장백현에 국민단(國民團)을 조직하고 총무로 활동하면서 무장항일세력을 후원하기 위한 농민회(農民會)를 조직하였다.
같은 해 8월 만주 지역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운동이 전개되어 통의부(統義府)가 조직될 무렵 국민단을 광정단(匡正團)으로 개편하고 총무장(總務長)과 단장(團長)으로 활동하였다.
1923년에는 상해(上海)에서 개최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에서, 임시정부를 부인하고 공산주의자를 포함한 각지의 독립운동가로 새롭게 정부를 구성하자는 창조파(創造派)의 일원으로 활동하였다.
그 해 6월 창조파가 조직한 한국국민위원회(韓國國民委員會)의 국무위원으로 선임되었다. 1924년에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령(國務領)인 이상룡(李相龍)에 의해 국무위원에 선임되었다.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끝난 1923년 11월부터 길림(吉林)에서 신숙(申肅) 등 창조파의 대표자들과 함께 만주에 있는 각 단체의 통일을 협의하고, 1924년 정의부(正義府)의 결성을 주도하였다.
정의부에서 중앙행정위원장(中央行政委員長)과 외교위원장으로 만주의 동변도(東邊道) 각지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26년 10월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무원(國務員)에 선임되고, 1928년 8월 이후에는 길림성 부근에서 정의부의 특별위원으로 활동하였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