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사홍(士弘), 호는 파강(巴江). 윤태주(尹泰周)의 아들이다. 유신환(兪莘煥)의 문인으로 유신환의 행장을 짓기도 하였으며, 윤정현(尹定鉉)에게도 수학하였다.
1851년(철종 2) 문과정시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훈련원정과 성천부사를 지냈는데, 1857년 평안남도암행어사는 윤병정에게 죄줄 것을 요청하였다. 1861년 성균관대사성에 임명되었고, 1862년(고종 1) 이조참의·대사간·1865년 승지 등을 지내며 안동김씨 세력에 반대되는 태도를 취하였다.
1873년(고종 10) 강원도관찰사로 임명되어 3년을 재임한 뒤 다시 대사간·한성부판윤을 지냈다. 공조판서로 문과초시의 시관(試官)이 되었으나 과폐(科弊)로 인하여 숙천부에 유배의 명을 받았다가 한달 뒤 석방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낙향하였다.
노모봉양을 이유로 조정의 상경독촉을 피하였고, 동시에 호포(戶布)의 혁파, 서원의 복설과 같은 대원군정책에 정면으로 반대되는 의견도 상소하였다. 이듬해 가을에 예조판서에 임명된 뒤 이조판서·제학·판의금부사 등을 역임하였고, 마지막으로 판돈녕부사를 지냈다. 저서로는 『파강유고(巴江遺稿)』가 있다. 시호는 효문(孝文)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