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사교(士交), 호는 하운(下雲). 윤회선(尹會善)의 아들이다.
1875년(고종 12) 별시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해 12월에 주천(注薦)된 뒤 수찬·교리를 거쳐 1889년 사간원 대사간(司諫院大司諫)이 되었고, 이조참의·대사성·부호군(副護軍)에 이르렀다.
1892년강계 겸 성천안핵사(江界兼成川安覈使)로 차하되었으나 칭병으로 사직하였기 때문에 견책을 당하였다. 다시 이조참의와 대사간을 거쳐 1896년 새로운 지방행정제도에 따라 부(府)가 된 춘천부의 관찰사가 되었고, 궁내부특진관 겸 비서원경에 임명되었지만 을미사변 때 흉적을 막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취임을 하지 않았다.
또한, 전의사등록(典醫司謄錄)과 비서감일기(秘書監日記)에 기재된 자신의 이름마저 삭제해줄 것을 요청하여 왕의 허가를 얻었다. 또, 김윤식(金允植) 등이 을미사변에 관련되었으므로 극형에 처하여야 한다고 상소하기도 하였다.
다시 궁내부협판으로 대신서리가 되어 명성황후의 장례를 거의 총지휘하였다. 광무연간에는 고종의 측근으로 궁내부 소속의 각 아문의 장관을 역임하며 주로 왕실사무를 관장하였다.
1900년에 일본인과 직산금광채굴합동조약을 맺었고, 궁내부관제를 새로운 관제로 개정하였으며, 또한 법규교정소(法規校正所)의 의정관이 되어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 제정에 참여하였다. 마지막으로 의정부찬정을 지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