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경중(景中). 윤좌열(尹佐烈)의 아들이다.
1855년(철종 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정언·지평·부수찬·호조좌랑을 거쳐, 1877년(고종 14) 동래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의정부는 일본과의 무역에서 관세를 징수하기로 하고, 윤치화에게 품목별 세율과 금수품목을 정하고 조선상인부터 징세하도록 지시하였다. 두모진(豆毛鎭)에 해관을 설치하고 징세하겠다는 취지를 부산주재 일본관리관에게 통고하고 정세책자(定稅冊子)까지 송부하였다.
일본관리관은 곧 그 조처는 병자수호조약에 위배되는 것이라고 항의하였지만, 조선상인에게만 해당되는 것이므로 일본이 관여할 바가 못된다고 일축하였다. 이에 일본상인들은 병정들과 함께 시위를 벌였고, 여기에 자극된 백성들은 투석으로 맞섰다. 동래관아에 난입한 일본인들은 윤치화와 역관 현석운(玄昔運)을 총칼로 위협까지 하였다.
일본정부는 대리공사 하나부사[花房義質]와 군함을 급파하여 무력시위를 벌였으나, 윤치화는 정부의 지시를 기다려야 한다고 하며 굴하지 않았고, 또 철시로 대응하였다.
이 무력시위에 놀란 정부는 징세를 중단하였고 윤치화가 일본인의 칼에 부상당한 것은 수치이며 모욕이라는 이유로 윤치화를 파직하였다. 그러나 윤치화는 실제로는 1879년 6월까지 동래부사로 재직한 뒤 승지로 승진하였다. 1885년과 1886년에 대사간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