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평(海平). 초명은 윤치수(尹致秀). 자는 성여(成汝), 호는 금범(錦帆). 윤득녕(尹得寧)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백동(尹百東)이다. 아버지는 참판 윤명렬(尹命烈)이며, 어머니는 정태화(鄭泰華)의 딸이다. 윤경렬(尹敬烈)에게 입양되었다.
1827년(순조 27)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사관(史官)이 되었고, 1835년(헌종 1)에 홍문관에 들어갔다. 1838년에 태조의 영정을 보완하여 광명전(光明殿)에 옮길 때에 대축(大祝)으로서 일을 처리하여 가자(加資)되었고, 1842년 대사성에 올랐다.
1845년 의주부윤이 되었는데, 사삼세(私蔘稅)의 폐지를 건의하기도 하였다. 1848년 순조와 익종에게 존호를 추상(追上)할 때에 행도승지(行都承旨)로서 가자되었고, 『삼조보감(三朝寶鑑)』을 태묘(太廟)에 봉서(奉書)할 때에도 호군(護軍)으로서 일을 수행하여 가자되었다.
같은 해에 이조참의를 거쳐 1849년 형조판서가 되었고, 1853년(철종 4) 예조판서로서 존호도감제조(尊號都監提調)를 겸임하였다. 이듬해 한성부판윤으로서 동지사(冬至使)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온 뒤 대사헌이 되었다.
그 뒤 판의금부사·지중추부사·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저서로 『난초(爛抄)』·『박종지(博綜誌)』가 있으며, 시호는 문헌(文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