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령남씨 족보는 조선 후기 문신 남익훈이 1693년에 편집하여 간행한 의령남씨의 족보이다. 체제는 표지, 서문, 보도로 구성되어 있다. 서문은 1697년(숙종 24)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지었다. 보도는 8층 횡간으로 구획되어 있고, 매 면은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자표가 매겨져 있다. 서문에 따르면, 고려말 영양남씨 남진용의 세 아들 중 둘째인 남군보(南君甫)가 의령남씨로 분관하였다. 이 족보는 의령남씨 족보 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것으로 체제와 내용이 비교적 충실하여 자료적 가치도 매우 높다.
분량은 4권 2책이며, 권1은 1책, 권2∼4가 1책이다. 2책 말미의 “계유년에 함흥부에서 간행했다(癸酉歲咸興府開刊)”이라는 간기에 따르면, 1693년 함흥부에서 목판으로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표제와 판심제 모두 “의령남씨족보”이다. 크기는 반곽이 가로 20.5cm, 세로 26.6m이며, 유계(有界), 서문은 8항 16자, 주쌍행(註雙行), 선장(線裝), 저지(楮紙)이다.
체제는 표지(表紙), 서문(序文), 보도(譜圖)로 구성되어 있다. 범례와 발문은 없으며, 1책의 맨 말미에는 남재(南在)의 시문과 남재 · 남심(南深)의 왕지(王旨)가 판각되어 있다.
서문은 1697년(숙종 24) 영의정 남구만(南九萬)이 지은 것이다. 이 서문에 따르면, 의령남씨는 신라 때 귀화한 남민(南敏)의 후손으로 그 원류는 영양남씨(英陽南氏)였다.
그러나 고려말 남진용(南鎭勇)의 세 아들 중 장자 남홍보(南洪甫)만 영양남씨를 유지하고, 차자 남군보(南君甫)가 의령남씨, 3자 남광보(南匡甫)가 고성남씨로 분관함으로서 남씨도 3관으로 분리되게 되었다. 즉 의령남씨는 남군보를 시조로 하는 영양남씨의 한 분파임을 알 수 있다.
역시 서문에 따르면, 의령남씨는 17세기 이전에 이미 두 종류의 구보가 있었지만 내용이 매우 소략하여 남선(南銑)이 이를 수정하였지만 이 역시 미비점이 많았다고 한다. 이에 남익훈(南益熏)이 동종을 탐방하고 여러 자료를 수합하여 보다 완본(完本)을 편찬한 다음 임지인 함경감영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것이다.
당시의 책판은 남익훈의 아우 남치훈(南致熏)이 경주부윤에 임명되자 해운으로 경주로 옮겼고, 부윤직에서 해임되자 다시 의령 소재 남진용의 산소 아래로 옮긴 것을 진주목사로 부임한 막내 동생 남지훈(南至熏)이 영구 보관을 위해 장판실(藏板室)을 지어 보존하였다고 한다.
보도(譜圖)는 8층 횡간으로 구획되어 있으며, 매 면은 천자문의 순서에 따라 자표(字標)가 매겨져 있다. 권1의 첫 장에는 남씨의 시조 남민의 약전을 기록한 다음 중간 부분에 8층 횡간을 그어 맨 위의 남주(南倜)부터 그 아래로 7세손 홍보 · 군보 · 광보 형제까지 수록하였다. 남주를 맨 상단에 둔 것은 남민과의 계대(系代)가 미상이기 때문인 것으로 생각된다.
그 다음 장에서는 의령남씨의 시조인 남군보에서 그의 현손대까지 수록하고 그 하단은 공백으로 처리한 다음 장을 바꾸어 남재부터 수록하고 있다.
이는 이 족보가 군보의 손자 천로(天老)의 장자 을번(乙蕃)→재(在) · 은(誾) · 실(實) · 지(贄) 계열과 차자 을진(乙珍)→근(瑾) · 이(珥) · 규(珪) · 집(緝) · 속(續) · 약(約) 계열을 중심으로 편집되었음을 말해 준다. 이런 방식으로 1책에는 군보의 11세손까지, 2책에는 대략 15∼16세손까지 수록되어 있다.
각 인물의 주기는 17세기 이전에 활동한 사람은 비교적 자세한 편이고, 이 이후의 인물은 상대적으로 소략하다. 전자의 경우 현달한 인물은 자(字), 호(號), 과거(科擧), 관직(官職), 시호(諡號), 봉호(封號), 묘향(廟享) 관계, 묘소(墓所) 위치, 배위(配位)의 성관(姓貫), 처부의 이름, 묘소 위치 등이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고, 그 나머지 인물도 과거, 관직, 묘소의 위치, 배위의 성관, 처부의 이름은 반드시 기재하고 있다. 사위와 외손은 대부분 본관이 생략된 채 과거 또는 관직만 기록되어 있다.
자녀는 선남후녀(先男後女)에 입각하여 등록되었으며, 외손과 서자녀도 수록되어 있다. 외손은 대략 3대를 수록하였고, 서자계열은 수록에 있어 대수 제한이 전혀 없는 것이 특징이다. 단 다른 족보와는 달리 서자는 측자(側子), 서녀는 측녀(側女)로 표기한 것이 이채롭다.
양자로 나간 경우는 본생(本生) 항목의 이름 하단에 “출위○○후”(出爲○○后)라 표기하고, 양계(養系)에서는 이름 위에 계(繼) 자를 표기하여 출계관계를 명확히 하였다.
한편 1책 말미에 수록된 시문은 남재 친필의 시를 판각한 것이다. 이 시는 초서체의 7언시인데, 그 내용은 “붕격청운만리여(鵬擊靑雲萬里餘) 한림호기숙견제(翰林豪氣孰肩諸) 월봉여득신시구(月峰如得新詩句) 막석송창지척서(莫惜松窗咫尺書)이며, 하단에 구정남재(龜亭南在)라 씌여 있다.
왕지는 1399년(건문 1) 남심이 통훈대부에 임명될 당시의 왕지와 1415년(태종 15) 9월 남재가 “순충분의동덕개국공신 대광보국숭록대부 의령부원군 수문전대제학세자부(純忠奮義同德開國功臣大匡輔國崇祿大夫宜寧府院君修文殿大提學世子傅)”에 임명될 때 작성된 왕지이다. 이처럼 선대의 시문이나 왕지(敎旨) 원본을 판각하는 예는 다른 족보에서 쉽게 발견할 수 없는 매우 드문 경우라 하겠다.
이 족보는 의령남씨 족보 중에서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로서 체제와 내용이 비교적 충실하여 자료적 가치도 매우 높다. 선남후녀적인 수록 방식과 출계 사항을 명시한 점 등을 고려한다면 유교적 종법 의식이 강하게 반영된 17세기 중후반 족보의 전형적인 형태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