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덕수(德水). 일명 일영(鎰永) · 봉기(鳳基). 자는 공익(公益), 호는 송강(松崗). 충청남도 아산 출신이다.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여 천안에서 일본경찰에게 잡혔다가 탈출하여 만주로 망명하였다.
그 뒤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7기생으로 졸업하고 다시 한국독립연성대(韓國獨立練成隊)에서 6개월간 교육을 받고, 1920년 청산리전투를 비롯한 여러 전투에서 중대장으로 활약하였다. 자유시를 거쳐 일크스크로 가서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에 관계하다가 자유시참변으로 다시 만주로 돌아왔다.
1922년 여름 연길현 명월구(延吉縣明月溝)에서 김규식(金奎植) · 고평(高平) · 이범석(李範奭) 등이 고려혁명군(高麗革命軍)을 편성할 때 참여하여 동북만주 밀산(密山) · 호림(虎林)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중국군을 격파하였다.
1925년 영안(寧安)에서 김좌진(金佐鎭)을 중심으로 신민부(新民府)가 조직될 때 참가하여 경비대장을 지냈다. 그 뒤 1929년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조직하여 위원이 되었고, 이어서 무정부주의자연맹과 신민부가 합작하여 재만한족총연합회(在滿韓族總聯合會)를 결성하여, 김좌진을 주석으로 추대하고 군사위원장으로 활약하며 새로운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1930년 김좌진이 공산당원인 김봉환(金奉煥, 일명 一星)의 조종을 받은 박상실(朴尙實, 일명 尙範)에게 피살되자, 치안대를 조직하고 중동선(中東線) 일대를 엄중히 방위하여 공산당의 발호를 방지하고, 중국 치안당국과 연락하여 범인수색에 착수, 해림역(海林驛) 부근의 공산당소굴을 급습하여 김봉환을 체포, 처단하였다(하수인 박상실은 끝내 잡히지 않았음).
1932년 한족총연합회 주하지방(珠河地方) 집행위원장이 되어 지하운동을 전개하여 재만한인들에게 배일사상을 고취하였다. 1944년 9월 한국광복군을 별설할 때 참모장에 임명되었다.
광복 후 한국독립당 중앙감찰위원회 사찰부장이 되었으며, 정부수립 후에는 국군에 입대하여 1949년 제주도병사구사령관을 역임하고 방위군옹진지단 고문관으로 활약하던 중 6·25때 전사하였다.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