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여인(汝人), 호는 어당(峿堂). 이연주(李演周)의 아들로, 어머니는 윤씨이다.
한원진(韓元震)의 학통을 이은 호론(湖論)에 속하였다. 동문으로 민상호(閔象鎬)·성기운(成岐運)·서응순(徐應淳) 등이 있고, 임헌회(任憲晦)와도 교우하였다. 또한 윤정현(尹定鉉)·신헌(申櫶)과 같은 노론인사들과도 친숙하였다. 어려서부터 가난하고 병약했으나 15세 때 상경해 수학하였다. 특히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구방심(求放心)을 학문의 요체로 삼았고, 제갈공명(諸葛孔明)과 도연명(陶淵明)을 좋아하였다. 충청도 회인과 공주에 거주하며 박문호(朴文鎬)와 같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학문에 있어 먼저 문리의 중요성을 강조해 갱신고(更辛苦)·순승법(循繩法)과 같은 독특한 교수법을 창안하였다.
1855년(철종 6) 선공감가감역(繕工監假監役)이 되었고, 임술민란 뒤 「응지삼정소(應旨三政疏)」를 올렸다. 1880년(고종 17) 고종이 문학과 재능이 있는 인물을 천거하도록 명하자, 천거를 바라고 청탁하는 자들이 많았다. 이 때 이상수는 문학에 능하고 서울의 노론 고관들을 많이 알고 있어 김낙현(金洛鉉) 등과 함께 경연관 겸 서연관에 임명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취임하지 않았다.
다시 시강원진선과 사헌부집의 등을 제수받았으나 사직하였다. 1882년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개화정책에 반대하는 소와 실학(實學)과 실사(實事)에 힘쓸 것을 주장하는 소를 거듭 올렸으나, 당시 청나라에 있던 대원군의 환국에 대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비난이 있었던 것 같다. 1910년 규장각제학에 추증되어 시호를 받았다. 저서로는 『어당집』이 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