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경춘(景春), 호는 하석(霞石)이다.
1871년 연풍현감·단성현감으로 임명되었고, 1873년 호조좌랑이 되었다. 1875년 문과에 급제한 후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었고, 이 때부터 여러 차례 사간원 대사간으로 임명되었다. 1882년 이조참의·성균관대사성·호조참판·병조참판, 1883년 형조참판, 1885년 이조참판, 1887년 양주목사, 1889년 사간원 대사간·사헌부 대사헌으로 발령을 받았다.
1890년 예조참판으로 임명되었고, 고종의 왕위선양과 왕세자(훗날 순종)의 대리청정을 모의한 민씨 세력과 충돌하였다. 1891년 왕세자 칭경절(稱慶節) 때 행호군을 지내면서 “사람에게는 두 하늘이 없고 하늘에는 두 해가 없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가 불경죄로 1894년 6월까지 흑산도에 유배되었다. 사면 이후에 예조판서·법무대신·광주부 유수·의정부 찬성 등에 임명되었다. 1895년 경연원경으로 발령을 받았고, 1896년 왕태자궁 일강관을 겸하였으며, 1898년 중추원 의관이 되었다. 1902년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되었고, 숭록대부로 승진하였다. 1906년 ‘을사늑약’에 분개한 최익현이 의병을 일으키고 이용원을 대장으로 추대하였으나 거절하였다.
1908년 규장각 대제학과 국조보감 교정관으로 임명되었고, 기로소 당상으로 원로 대우를 받았으며, 통감 이토 환영회에 참여하였다. 1908년과 1910년 내각 경질설이 있을 때마다 통감의 환심을 얻어 총리대신이 되려고 노력하였다. 1909년 한·일 두 나라 황제폐하에 대한 ‘어진(御眞) 및 송덕비 창건’ 에 참여하였다. 1910년 일진회의 ‘합방청원서’에 찬성하였고, ‘한일합병’을 관철하기 위해 조직된 국민협성회의 합병실행 추진단체인 한국평화협회에서 활동하였다.
국권피탈 직후인 1910년 9월 김성근(金聲根) 등 70세 이상의 원로들과 함께 총독 데라우치에게 기로소 설치를 청원하였다. 1910년 10월 7일 한일합병에 대한 공로로 남작 작위를 받았고, 1911년 1월 2만 5천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1911년 8월 사망하였고, 같은 해 10월 손자 이원호(李原鎬)가 작위를 물려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