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섭은 구한말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연해주에서 김알렉산드리아 등과 교섭하며 사회주의운동을 시작하여 한인사회당 중앙위원, 소련공산당 연해주위 선전선동부원 등을 역임하였다. 국내에서는 대한독립단원을 원조하는 등의 활동을 한 사회주의운동가이다.
이인섭(李仁燮)은 1888년 평안남도 평양 근교의 빈농 집안에서 태어났다. 호는 옥천(玉泉)이며 이명은 이이반, 이용연, 강보국(姜保國), 심만장, 김상필, 리 이반 세르게예비치이다. 이인섭이라는 이름은 연해주로 망명을 시도하다 수감 생활을 한 후 석방될 때 중국 마적 두목이 주선해준 여권상의 중국 이름을 본명처럼 사용하였다. 어린 시절 유학을 공부하였고, 평양에서 소학교를 다녔으며, 예배당에도 출입하였다.
1907∼1910년 평안남도 맹산 · 양덕 · 영흥 · 요덕 등지에서 활약하는 의병부대에서 활동하였고, 한일 강제 병합 후 국경을 넘어 남만주 임강현(臨江縣)으로 의병부대원과 이동하였으나, 중국 당국에 의하여 무장해제를 당하였다. 1913년 연해주로 이주하여 독립운동 활동을 모색하였다. 1917년 옴스크로 건너가 볼셰비키들과 친교를 맺으면서 사회주의 사상을 수용하였다. 여기서 김알렉산드라에게 사회주의 노선과 활동을 권유받고 ‘우랄노동자동맹’을 결성하였다. 1918년 그녀와 함께 하바롭스크로 가서 12월 극동소비에트 정권 수립에 참여하였다.
1918년 4월에는 하바롭스크에서 열린 한인사회당 창립대회에 참가해 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다. 1918년 가을 하바롭스크가 백군에게 점령당하자 옴스크로 이동해 러시아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일하였다. 1919년 11월에는 러시아공산당에 입당하였고, 옴스크 소재의 러시아공산당 시베리아국 고려부 소속으로 활동하였다. 1920년 봄부터 이 단체의 기관지 『새벽북』 발행에 참가하였고, 모스크바로 가서 10월 러시아공산당 모스크바당위원회 중국부 선전선동부장과 비상위원회 군사검열관으로 활동하였다. 중국어 등의 외국어 실력을 바탕으로 1921년 극동공화국 외무인민위원회에 파견되어 일하였다.
1921년 10월 평안북도 운산에서 대한독립단원을 원조한 혐의로 체포되어 기소유예 처분을 받았다. 1921년 10월에서 1922년에 10월까지는 중국과 한국의 빨치산 부대와 함께 여러 전투에서 함께 싸웠다. 1923년에는 소련공민증을 받았다. 1924∼1925년에는 니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징세 업무를 담당하였고, 니콜스크우수리스크 소련공산당 중국 · 한인 합동 야체이카(세포조직) 책임서기 및 소수민족구락부 부장으로 활약하였다.
1925년에서 1930년 1월까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소련공산당 연해주의 선전선동부원으로 일하였다. 1929년 만주 군벌 장쉐량〔張學良〕의 도발로 동청철도 분쟁이 일어나자 다시 군에 입대하여 소련군 연해주 군관부 참모부에서 활동하였고, 싼차커우〔三岔口〕 전투와 미쉬안시 점령전에 참가하였다.
1932년까지 국경수비군 참모부에 근무하였고, 1933∼1936년에는 소련군 극동특립군 참모부가 설립한 사관학교에서 수학하였다. 이인섭은 국경수비대 감시소 소장으로 근무하다가 1937년 9월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강제 이주당하였다가 1952년에는 우즈베키스탄 안디잔으로 이주하였다.
1967년 10월혁명 50주년에 소련 정부로부터 적기훈장을 받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평가하여 2006년에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