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4년(성종 25)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연산군 때 홍문관 정자 · 저작 · 박사 등을 지냈다. 연산군이 즉위한 뒤 폭정을 자행하려는 기미가 보이자 경연에서 강력히 간언하다가 외직인 함창현감(咸昌縣監)으로 보임되었다. 거기서 여씨향약(呂氏鄕約)을 보급해 백성을 교화하고 풍속을 개선하였다고 한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자신이 반드시 처형될 것으로 생각해 음주로 세월을 보내다가 이듬해 3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성현(成俔)이 『용재총화((慵齋叢話)』에서 “우리나라 가문 가운데 광주이씨만큼 번성한 집안이 없다.”라고 평가할 만큼 많은 인물이 광주이씨 집안에서 배출되었다. 특히, 이자의 할아버지인 이극감과 숙부인 이극배(李克培, 영의정), 이극감(李克堪, 영중추), 이극돈(李克墩, 좌찬성), 이극균(李克均, 좌의정)은 모두 과거에 급제하고 고관을 역임하였다.
이자의 세 아들 모두 조광조(趙光祖)와 친밀하였고, 기묘사림의 일원으로 평가된다. 이런 측면은 이른바 조선시대 ' 훈구파'와 ' 사림파'의 연속성을 보여주는 수많은 증거 가운데 하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