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삼길(朴三吉)의 본관은 면천(沔川, 지금의 충청남도 당진), 자는 동리(東利)이다. 증조할아버지는 박승검(朴承儉), 할아버지는 박유(朴攸), 아버지는 박효순(朴孝順), 어머니는 정씨(鄭氏)이다. 부인은 남양홍씨이며, 인욱(仁郁) · 의욱(義郁) · 무욱(武郁) 등 세 아들을 두었다.
어릴 때부터 힘이 뛰어났고 활을 잘 쏘았다고 한다. 무예를 익히는 것도 중요하지만 학문을 함께 닦아야 한다는 아버지의 권고로 방향을 바꿔 학업에 전념해 29세 때인 1471년(성종 2) 진사시에 입격하고, 1474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33명 가운데 10위). 이듬해 하정사(賀正使) 이파(李坡)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왔다.
성종 때는 사간원 정언 · 헌납, 사헌부 지평 · 장령, 예조좌랑 등의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하였다. 1492년(성종 23)에는 문신 가운데 무재(武才)가 있는 인물로 추천되기도 하였다. 연산군 때는 내섬시 부정, 대사간, 병조참의, 이조참판 등을 지냈다. 연산군 때 사화에 연루되지 않은 까닭은 1479년(성종 10) 중전 윤씨가 서인(庶人)으로 폐출되자 병을 핑계로 조정에 나가지 않고 추모하는 마음을 보였는데, 그 사실을 연산군이 좋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한다.
청렴과 절개를 알려주는 일화가 몇 가지 남아 있다. 연산군이 폭정을 자행하면서 상기(喪期)를 단축했는데, 박삼길은 아버지의 삼년상을 다 치르지 못한 상태에서 회양부사(淮陽府使)로 재직하게 됐지만 업무를 보면서도 늘 근신하고 거친 음식을 먹으면서 심상(心喪)을 마쳤다. 임기를 마치고 이임하자 그곳 백성들은 그의 청렴함을 사모해 길을 막고 울었으며 생사당을 세워 제사지냈다.
그뒤 박원종(朴元宗) 등이 반정을 일으켜 중종을 추대하려고 하자 박삼길은 “연산군이 참으로 어질지 않지만 그가 내린 벼슬과 녹봉을 받아 2품에 이르렀으니 어찌 폐출(廢黜)되는 것을 보겠는가.”라고 말하고 사직하였다. 그뒤 고향으로 내려가 청빈하게 생활하면서 교육에도 힘쓰다가 67세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