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이종희(李鍾熙), 이종희(李宗熙), 박사(博士), 계원(桂元), 한창원(韓昌元). 함경남도 북청 출신이다.
어려서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한 뒤 1918년 봄 북청에서 보통학교를 졸업했다. 1921년 서울의 중동학교를 중퇴했다. 1922년 봄 용정(龍井) 동흥(東興)중학에 입학했다. 1925년 2월 동흥중학을 중퇴한 뒤 왕청현(汪淸縣) 태평구(太平溝)에서 교사를 지냈다.
1926년 8월 중동선(中東線)의 목릉(穆陵)에서 원동(遠東)학교 교사가 되었다. 이 무렵 만주 고려공산청년회에 가입해 목릉야체이까에 배속되었다. 1927년 1월 고려공산청년회 만주단체협의회에 참가했는데 이 모임에서 이른바 ‘만주공청’그룹은 조선공산당 입당을 결의했다.
1927년 6월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조직부장으로 선임되었고, 1927년 9월에는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책임비서가 되었다. 1927년 9월 당내에 파벌을 조성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으로부터 견책처분을 받았다. 1927년 10월 제1차 간도공산당 검거사건이 발생하자 검거를 피해 소련으로 탈출했다.
1927년 12월 블라지보스토크에서 코민테른 연락부의 후원 아래 소련으로 망명한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망명자대회를 개최했다. 같은 달 조선공산당 및 고려공산청년회(ML파) 중앙간부와 연락하기 위해 귀국하던 중 중국관헌에게 체포되었다가 1929년 5월에 출옥했다.
1929년 8월 모스크바에서 프로핀테른(국제적색노동조합)이 지방활동가를 양성하기 위해 설치한 강습소에 입학했다. 1930년 5월 코민테른 블라지보스토크 연락부와 접촉한 뒤 남만주를 거쳐 같은 해 6월 귀국했다.
1931년 6월 이문홍(李文弘)과 함께 적색노동조합운동에 참가했다. 1931년 8월 모스크바 동방노력공산자대학을 졸업하고 국내에 잠입한 한사빈(韓士斌)으로부터 적색노동조합 이론을 지도받았다.
같은 달 흥남적색화학노동조합 조직 책임자로 선정되었다. 1931년 11월 함경남도 신흥에서 신흥공산주의열성자협의회를 개최했다. 1932년 5월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1933년 12월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