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는 풍영(豊泳). 판서 민응식(閔應植)의 가인(家人)으로 명례궁(明禮宮) 장토(庄土)를 8년간 관리하였다. 1881년(고종 18)경 일본에 다녀온 적이 있다. 1895년 1월 영관(領官)으로 병정 600명을 지휘하여 일본군과 합동으로 순천의 동학군을 공격하였다.
이 공적으로 박영효(朴泳孝)가 추천하여 군부감독·경리국장·군부협판이 되고, 군부대신서리를 지냈다. 박영효가 역적혐의로 일본에 망명한 뒤 이 직위에서 물러났다. 민비시해를 결정한 일본서기관 스기무라[杉村濬]가 대원군파인 이주회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 뜻을 알렸다. 을미사변 당일 궁내부와 군부의 고문관이던 오카모토[岡本柳之助]와 함께 대원군을 옹위하며 입궐하였다.
민비시해 범인으로 붙잡혔고, 그 해 11월 춘생문사건(春生門事件)으로 위협을 느낀 김홍집(金弘集)·유길준(兪吉濬) 등 친일파 고위관리들에 의하여 서둘러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주회를 사형시킨 것은 그 범죄보다 그들의 죄상이 밝혀질까 두려워 입을 막기 위한 계책이었다고 한다. 혹은 민비시해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