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억

  • 역사
  • 인물
  • 조선 후기
조선 후기에, 공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 덕유(德庾), 항수(恒水)
  • 성헌(醒軒)
인물/전통 인물
  • 본관연안(延安, 지금의 황해도 연백)
  • 사망 연도1770년(영조 46)
  • 성별남성
  • 주요 관직공조판서|형조판서|병조판서
  • 출생 연도1699년(숙종 25)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최진옥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사)
  • 최종수정 2026년 03월 05일
해동진신도상 중 이지억 초상 미디어 정보

해동진신도상 중 이지억 초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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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 후기에, 공조판서, 형조판서, 병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덕유(德庾) · 항수(恒水), 호는 성헌(醒軒). 이조판서 이광정(李光庭)의 후손이며, 이성징(李星徵)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형(李泂)이고, 아버지는 이만선(李萬善)이며, 어머니는 윤형미(尹亨美)의 딸이다. 정랑 이만성(李萬成)에게 입양되었다.

생애 및 활동사항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여당이라는 무고를 당하여 친국을 받았으나 논리정연하게 논변하여 영조로부터 비상한 재주를 인정받게 되었다. 1751년(영조 2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 · 장령을 거쳐 승지가 되었다.

1754년 강릉부사 · 도승지를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기까지 벼슬에 나간 지 10년이 못 되어 정경(正卿)의 자리에 올랐는데, 관작은 모두 왕의 특교(特敎)에서 나온 것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그의 승진이 관작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처사라 하여 여러 차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 때문에 이 후 공조 · 형조 · 병조판서와 한성부판윤을 역임하는 동안 파직과 등용이 반복되었다. 그가 죽자 영조는 몹시 애석히 여기고, 그에게 자식이 없으므로 입후(立後)하게 하였으며 상례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내려주었다.

참고문헌

  • - 『영조실록(英祖實錄)』

  • - 『국조방목(國朝榜目)』

  • - 『학서집(鶴棲集)』

주석

  • 주1

    : 문과 급제 : 『국조문과방목』 卷之十五(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106])

  • 주2

    : 관련 내용 : 『영조실록』 115권, 1770년(영조 46) 8월 16일. "전 판서 이지억의 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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