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덕수(德廋)·항수(恒水), 호는 성헌(醒軒). 이조판서 이광정(李光庭)의 후손이며, 이성징(李星徵)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형(李泂)이고, 아버지는 이만선(李萬善)이며, 어머니는 윤형미(尹亨美)의 딸이다. 정랑 이만성(李萬成)에게 입양되었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여당이라는 무고를 당하여 친국을 받았으나 논리정연하게 논변하여 영조로부터 비상한 재주를 인정받게 되었다. 1751년(영조 2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장령을 거쳐 승지가 되었다.
1754년 강릉부사·도승지를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기까지 벼슬에 나간 지 10년이 못 되어 정경(正卿)의 자리에 올랐는데, 관작은 모두 왕의 특교(特敎)에서 나온 것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그의 승진이 관작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처사라 하여 여러 차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 때문에 이 후 공조·형조·병조판서와 한성부판윤을 역임하는 동안 파직과 등용이 반복되었다. 그가 죽자 영조는 몹시 애석히 여기고, 그에게 자식이 없으므로 입후(立後)하게 하였으며 상례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내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