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황해도 안악에서 출생했다. 1909년 8월 안악사범강습소를 졸업하고, 1913년까지 안악보통소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했다. 1914년 3월 평양 장로회신학교에 입학해 1918년 6월 졸업했다. 신학교 재학 중 황해노회 조사(助事)로 있다가 졸업 후 황해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8년부터 1925년까지 안악군 동창교회, 재령군 해창교회, 모동교회, 사리원 동부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했다. 1921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연통제 황해도 교통사(交通司)로 임명되었으며, 이해 6월 주비단사건으로 체포되었으나 무혐의로 풀려났다.
1921년 황해노회 회장, 1924년 조선주일학교연합회 회장, 1924년 황해노회 주최 사경회 강사, 1925년 황해노회 종교교육부 총무와 제2회 조선주일학교대회 대회장, 1926년 4월 황해도면려청년연합회 발기인으로 활동했다. 1930년 2월 황해노회 주일학교 동부회에서 주최한 강습에 강사로 참여했으며 1932년 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장·부회장, 1933년 제22회 조선예수교 장로회총회에서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1937년 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 간사, 편집부장, 교육부장을 맡았으며, 1938년 조선기독교연합회 위원으로 선정되었다.
1938년 8월 기독교 애국좌담회에 참여했으며, 9월 신사참배 거부로 종로경찰서에 구금되었다. 그러나 이해 제27회 조선예수교 장로회총회에서 신사참배를 옹호했다. 1941년 조선장로교 신도 애국기헌납기성회 서기로 활동했으며, 1942년 4월 기독교신문협의회 창립 이사회, 9월 장로회 헌납해군기 명명식에 참석했다. 해방 후 안악군으로 귀향한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 알려진 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