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0년(동성왕 12) 동성왕(東城王)은 4명의 귀족에 대한 관작의 제수(除授)를 중국의 남제(南齊)에 요청하였다. 제수의 명분은 충성과 공로를 다하여 국난을 제거해서 사직을 견고하게 지킨 데 대한 논공이었다.
그런데 그에 관한 제수배경은 역대로 시무(時務)를 잘 보좌하고 무공 역시 뛰어난 데 두고 있다. 구체적으로, 그는 웅진천도 뒤 백제 중앙권력의 혼미상에 편승하여 이탈한 지방세력을 재흡수하는 데 군공(軍功)을 세운 것이다.
중앙권력의 지방침투의 확대 결과, 그는 지금의 광주(光州)지역의 담로장(檐魯長)인 면중왕(面中王)에서 지금의 고흥지역의 담로장인 도한왕(都漢王)으로 전임되었다.
이는 백제중앙권력의 남하를 의미하는 것이다. 어떻든 그는 백제 중앙권력의 지방지배에 큰 공을 세워 대왕권(大王權) 하의 왕으로 봉해졌으며, 중앙집권화의 토대를 구축하는 구실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