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9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본관은 정선(旌善). 호는 진암(振庵). 전성욱(全聖旭)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1931년 이인재와 결혼하여 1남 3녀를 두었다. 1930년 경성고등상업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에 유학해 1933년 일본 큐슈〔九州〕제국대학 법과를 졸업하였다. 1933년 일본 고등문관시험 행정과에 합격해 세무서에서 일하다가 1937년 군수로 승진하였다. 경기도 광주군수 재직 시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군용물자 조달, 군수품 제조 공출, 국방헌금과 애국기 헌납자금 모금 등의 전시업무를 적극 수행하여 『지나사변공적조서 』에 이름이 올랐다. 함경남도 상공과장, 대구세무국 직세부장, 경상북도 재무부장,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과장 등을 지냈다. 재직 중 조선중앙총동원경비협의회 위원, 조선중앙정보위원회 간사 등을 겸임했다.
해방 후 1945년 10월 미군정청 학무국장 보좌관을 지냈으며, 이듬해 9월 조선주택영단 이사장, 1948년 9월 외무부 통상국장, 1949년 서울시 부시장을 지냈다. 이어 1951년 9월 한국은행 부총재를 거쳐 1960년 4월 허정(許政) 과도정부의 부흥부 장관을 지냈다. 제2공화국이 출범하면서 1960년 9월 한국은행 총재에 임명되었다. 1963년 1월 민주공화당 창당발기인과 당무위원을 지낸 뒤, 그해 11월에는 민주공화당 중앙상임위원회의 부의장과 이듬해 12월 의장을 거쳤다. 1965년 8월에는 민주공화당 당의장 직무대리를 역임하였다. 1964년 5월부터 1966년 12월까지 건설부 장관을 지냈다.
이후 1967년 대한상공일보 회장, 1968년 대한국제법학회 회장을 지냈다. 1969년 11월 경희대학교에서 명예경제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80년 3월 민주공화당 당의장 서리, 1984년 6월 5·16민족중흥동지회 회장을 거쳤으며, 1987년 12월 신민주공화당 고문으로 추대되었다. 1994년 7월 4일 사망했다.
박정희정권의 관료와 정당인으로 활동하면서 박정희 대통령의 경제개발 논리를 뒷받침한 주요한 인물로서 평가된다. 저서로『도시계획과 국토개발』,『한국경제의 발전-회고와 전망-』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