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주는 전라도의 감영 소재지로서 행정을 비롯하여 농상공업의 중심지였다. 《택리지 擇里志》에서는 전주를 서울과 같은 대도회라고 기술하고 있다. 전주시장은 인근의 김제 · 금산 · 금구 · 진안 등지와 밀접한 상업망을 이루고 있었다.
《만기요람 萬機要覽》에는 조선 후기 전주의 읍내장(邑內場)이 전국의 15대 시장으로 꼽혔을 뿐만 아니라, 대구 · 평양 혹은 대구 · 공주와 함께 조선의 3대 시장으로도 불리고 있었다.
거래물품은 평야지대에 위치하였으므로 당연히 미곡이 으뜸이었고, 특산품인 생강 · 종이 · 부채 · 칠 · 자기 · 죽세품 · 감 · 석류 등과 그 밖에 토목 · 모시 · 연초 · 해산물이었다.
1894년 동학혁명 전에는 전주성의 사대문 밖에는 모두 장이 섰다. 가장 규모가 컸던 것은 남문인 풍남문(豊南門) 옆 서쪽의 남문밖장이었다. 싸전다리 좌우로 싸전들이 있었다. 설대전다리 아래에서는 2·7일장인 우시장이 섰으므로 그곳을 속칭 쇠전강변이라고 한다. 우시장이 열리면 수많은 소가 나왔고, 술판과 투전판이 벌어졌다.
이 우시장은 1914년 전주천 정화라는 미명 아래 현재 교대부속국민학교 남쪽 자리로 옮긴 뒤 쇠퇴하였다. 설대전다리 건너 완산칠봉으로 가는 길에서 서서학동으로 가는 초록바위까지는 솔가지 · 장작장수가 나왔으므로 솔가지전거리라고 한다.
이 솔가지시장은 6·25전쟁 후에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장을 이루었다. 설대전다리 아래쪽에서는 서천교(西川橋) 사이로 담뱃대 장사들이 좌전을 벌였다.
남문밖장은 19세기 중엽까지도 2일장이었지만, 서문밖장이 7일에 섰으므로 서남방에서는 2·7일장이 서게 된 것이다. 서문밖장에는 소금장수들이 독점적으로 장사를 하던 소금전이 있었고, 그 밖에 양념류를 파는 곳이 있었다.
또한 동문 밖과 북문 밖에도 각각 4일과 9일에 장이 서 동문에서는 한약재 및 특용작물, 북문에서는 비단 등 포곡과 잡목이 거래되었다. 그 밖에 전주에서 20∼30리 되는 곳에 이성장(伊城場) · 봉상장(峰上場) 등이 섰다.
약령시는 도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매상하여 조정에 올리기 위해 개설되었다. 약초의 채취, 출하되는 시기에 따라 일년에 일정기간 동안 열리는데 그 기간은 춘시(春市)가 3월 15일부터 25일, 추시(秋市)가 10월 15일부터 25일까지 였다. 장소는 다가동과 전동 사이의 약전골이었다. 그러나 200년 전쯤 공주에 약령시가 개설되면서 전주의 약령시는 시들해졌다.
20세기 초에 다시 장을 세울 계획이었으나 여의치 않았고, 다시 1923년 한의약계 인사들이 모여 부흥을 기도하였다. 그 결과 출시인(出市人)이 10여만 명에 이르고, 거래액이 10여만 엔(圓)에 달하는 성황으로 한때 대구의 약령시를 능가하기도 하였으며, 1930년대 중반에는 거래액이 60만 엔을 넘었다. 그러나 1943년 공포된 〈생약통제령〉에 따라 약령시는 막을 내리고 말았다.
개항과 경술국치 이후 경제가 식민지체제로 급속히 재편되면서 전주시장도 큰 변모를 겪게 되었다. 상설시장이 개설되었지만, 그 곳에 점포를 갖고 전주의 상권을 장악한 상인들은 일본인이었다.
또, 농산물 외에도 공장제품인 석유 · 포목 · 성냥 · 고무신 등 일용잡화가 시장에서 거래되었다. 이전 전주시장이 전라도의 상업중심지로서의 지위를 점차 상실하여, 마침내는 남원이나 김제의 시장보다 거래액이 적게 되었다.
일본인과 조선인 대지주, 그리고 농업회사는 인근의 평야지대에서 생산되는 미곡을 발달된 교통망을 통하여 전주를 거치지 않고 군산과 옥구로 반출하였다. 조선인으로서는 군산과 줄포(茁浦)의 객주들이 미곡 · 어염을 통해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의 상권을 잡았다.
전주시장은 단지 전주 일원에 한정된 상권을 가질 뿐이었다. 1923년에는 남문밖장과 서문밖장을 합쳐 남문밖장을 만들었고, 1929년에는 어채시장이 설치되었다.
1894년 동학혁명군이 전주에 입성할 때 불타버린 500여 호의 가옥 자리에 간이시장이 개설되어 1960년대 후반까지 지속되었다. 여기에 상설점포가 늘어나고 시장건물이 개축되어 현재의 남부시장이 되었다. 그리고 1948년에는 진북동과 태평동 부근에 중앙시장이 신설되었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전주의 경제력이 전라도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전주시가 생산공장 시설을 별로 가지지 못하였으므로 점차 경제적으로 침체하게 되었다. 그래도 1970년 이전만 해도 장날이면 농산물거래로 성시를 이루었다.
1989년 현재 중앙 · 남부 · 동부 · 서부 · 북부의 5개 장이 있지만 거의 상설시장으로 바뀌었다. 다만 우시장만 정기시로서 제모습을 지니고 있을 따름이다.
호남고속도로가 개통된 뒤 전주의 상권은 중간도매시장의 기능을 상실하고 더욱 위축되었다. 교통이 편리해지자 생산자와 소비자가 한결 가까워져 중간유통과정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고, 도매상인들은 직접 소비자들을 상대해야 하였다.
아예 전주의 상권 자체가 서울과 부산권에 속하게 되었고, 금산 · 진안 · 무주는 대전상권에, 고창 · 순창은 광주상권에 흡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