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1,168㎡이며, 원형봉 토분이다. 설총의 아버지는 원효(元曉)이고, 어머니는 요석공주(瑤石公主)이다.
신분은 육두품 출신으로 추측되며, 관직은 한림(翰林)에 이르렀다. 설총은 경사(經史)에 박학하였고, 이두(吏讀)의 정리에 크게 이바지하였으며, 「화왕계(花王戒)」를 지었다.
뒷날 그의 학문적 업적이 인정되어 고려시대인 1022년(현종 13)에 홍유후(弘儒侯)라는 시호를 추증(나라에 공로가 있는 벼슬아치가 죽은 뒤 그 관위를 높여줌)받았고 문묘(文廟)에 최치원(崔致遠)과 함께 배향되었으며, 또 조선 중기인 1623년(광해군 원년)에 경주서악서원(西岳書院)에 제향되었다. 한편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에는 설총을 경주 설씨의 시조로 기록되어 있다.
설총의 무덤에 대해서는 신라 및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자료에서는 확인할 수 없지만, 신라 당시의 형편을 고려해보면 경주에 있었을 개연성이 높다. 명활산 동쪽 아래에 있는 이 분묘는 족보에는 “묘월토산자좌(墓月土山子坐)”라는 기록에 비추어 산의 명칭에서 차이가 있지만 경주 단석산을 월생산(月生山)으로 부른 예가 있음으로 보아 명활산을 월토산으로 불렀을 가능성도 있다.
현재 명활산 동쪽 능선 아래에는 마을이 있고 인근에 10여 호의 가옥이 있다. 원래는 산록이었으나 개간이 이루어진 현재는 주위가 전답이다.
분묘의 둘레에는 아무런 장식이 없고 경주 및 순창(淳昌) 설씨 후손들에 의해 상석과 묘비가 만들어졌으며 외곽에 철책이 둘러 있다. 호석(능원에 세우는 범모양의 돌)은 흙 속에 묻혀져 있으나 일부의 흔적은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