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인들의 집단 거주는 생산물의 종류에 따라 결정되었다. 우선 다수의 장인이 동원되어 대량적인 생산과 소비가 요구되는 물종(物種)이어야 하기 때문에, 점촌은 토기·유기·철기·옹기를 생산하는 마을이나 광산촌이 많았다.
조선 전기까지만 해도 장인의 직역은 세습되는 것이 원칙이었고,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러한 제한이 완화되었다고 해도 점촌의 혈연성은 강하였다. 장인들이 오랫동안 한곳에 머물며 생산에 종사하기 위해서는 원료의 공급과 제품의 소비 등의 조건이 만족스러워야 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았으므로 장인들은 거주처를 자주 옮겼다. 따라서 점촌의 발생과 쇠퇴도 무상했다고 볼 수 있다. 장인이 소속된 각 관청을 비롯하여 거주지역의 행정관청은 호적 외에도 장인만의 장적(帳籍)을 따로 작성하여 수세·사역 등에 이용하였다.
이와 같이 장인들은 국가에 의해 특별하고 강한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관청과의 관계가 중요하였다. 아동과 노인을 제외한 장년의 장인은 제조한 물건을 관청에 바치거나 직접 관청에 가서 사역하는 일이 흔했다. 이처럼 공용(公用)으로 사역할 때는 전부는 아니더라도 각종 연호잡역(烟戶雜役)을 면제받는 예가 일반적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점촌 자체가 제역촌(除役村), 즉 각종 잡역을 면제받는 마을이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합법적인 사역과 면역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수령의 개인적 탐욕이나 지방관청 각 청(廳)의 계방촌(契房村) 혹은 관안부(官案付)가 되어 수탈을 당하기도 하였다. 이 밖에 서원·향교의 계방촌이 되는 경우도 있었다. 점촌이 비록 제역촌이 되었다고는 해도 부과된 역이 과중할 때는 장인들이 지치고 쇠약해져 도산을 면하지 못하였다.
점촌은 제역촌이기 때문에 빈한한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고, 군역(軍役)을 피하려는 한정(閑丁:國役에 나가지 않는 장정)의 소굴이기도 하였다. 또, 큰 점촌일 경우에는 장인만이 아니라 그들의 생산물을 행상 판매하는 소상인도 있었고, 임금노동자적인 존재들도 많이 거주하였다. 그러므로 점촌에서는 시끄러운 일이 자주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