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진도 출신.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에 다니다가 YMCA 영어반을 수료, 일본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에서 신학을 공부하던 중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자 귀국하여 감리교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27년 졸업 후 미국 개렛신학교(Garrett Theological Seminary)에서 수학하면서 미국 경험주의 신학의 대표자인 롤(Roll, F. H.)의 영향을 받아 자유주의 신학에 심취하였다.
1929년 다시 노스 웨스턴 대학원에 입학, 문학 석사학위를 받고, 1931년부터 1937년까지 감리교신학교의 조직신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이 기간 중 활발한 저술활동을 전개하여 60여 편의 학술논문을 발표하였는데, 특히 1932년에 발표한 「위기의 신학」은 처음으로 한국에 바르트(Barth, K.)신학을 소개한 논문이었다. 또한, 1934년에 나온『기독교의 원리』는 한국감리교의 교리적 선언을 신학적으로 해설해놓은 저술이었다.
그는 현대신학의 동향을 끊임없이 소개하여 신학계에 새로운 자극을 줌과 동시에 신학의 체계화를 위하여 정열적으로 활동하다가 건강을 해치게 되어 1937년부터 1939년까지 고향에서 요양생활을 하였다.
그동안 『기독교신학개론』과 설교집인 『그는 이렇게 살았다』를 집필하였다. 1939년부터 1년 동안 만주 사평가신학교(四平街神學校) 교장으로 근무하였다.
다시 고향에 내려와 요양 중 일본의 태평양전쟁 도발 이후 친미파로 몰려 8개월 동안 구금되었다. 석방 후 1943년전라남도 광주교회의 담임목사로 재직하면서 청년교육에 심혈을 쏟아 3년 동안 매일 새벽에 남녀청년들을 가르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