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정의
일제강점기, 기독교 신학자이자 목사.
인적사항
1920년 결혼한 허해덕(1931년 작고), 1932년 재혼한 김염의와의 사이에 8남 6녀를 두었다.
주요 활동
1921년 서울 기독교청년회학관에서 영어를 배운 후 일본 유학을 떠났다가 간토 대지진으로 학업을 중단하고 귀국했다. 1924년 3월 감리교 협성신학교 영문과에 입학하였고 7월 진도 소작인회 창설 회원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협성신학교 졸업 후 미국에 유학하여 시카고 게릿신학교와 노스웨스턴대학에서 신학석사 학위를 받았다. 1931년 귀국하여 감리교신학교 교수가 되었다.
보수적 장로교 신학자들로부터 ‘자유주의 신학자’란 비판을 받았지만 자신은 한국 신학의 좌표를 ‘향토화(鄕土化)’와 ‘시대화(時代化)’로 정의하고, 신학 노선에 대해 “나는 신앙에서 보수주의요, 신학에서 자유쥬의다.”라는 입장을 취하였다. 1940년 감리교신학교 폐교 후 북만주 사평가의 만주신학교 교장으로 취임했으나 일 년 후 폐교되어 진도로 귀향하였다. 1941년 12월 ‘친미파 스파이’ 혐의로 진도 경찰서에 수 개월 구금되었다. 1943년 2월 광주중앙교회 담임목사로 초빙을 받아 목회를 시작하였다. 일본기독교조선장로교단 전남교구장을 맡아 외견상 일제에 협조하는 모양새를 취하면서도 매일 새벽 교회 청년들을 모아 은밀하게 민족주의 신앙 교육을 실시하였다. 1945년 4월 1일 “날이 곧 밝는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별세하였다.
학문과 저술
참고문헌
단행본
- 고성은, 『철마 정경옥 생애연구』 (삼원서원, 2017)
- 김영명, 『정경옥: 한국 감리교신학의 개척자』 (살림, 2008)
- 유동식, 『한국신학의 광맥』 (전망사, 1984)
- 『정경옥 저작전집』 4권(감리교신학대학교출판부, 2005)
논문
- 선한용, 「정경옥 교수의 생애 재구성에 관한 일고찰」(『정경옥 교수 저작전집: 기독교신학개론』, 삼원서원, 2010)
기타 자료
- 이덕주, 「복잡에서 단순으로- 정경옥교수의 영성과 토착화신학」(2021년 진도학회 추계절례회: 철마 정경옥 선생의 삶과 신학세계 세미나 자료집』, 진도문화원, 2021. 12)
- 한규무, 「정경옥의 독립운동」(『2021년 진도학회 추계절례회: 철마 정경옥 선생의 삶과 신학세계 세미나 자료집』, 진도문화원, 2021. 12)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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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1923년 일본의 간토 지방에 발생하여 10만여 명의 사망자를 냈던 큰 지진. 재일 한국인이 폭동을 일으켜 약탈과 방화를 일삼는다는 유언비어가 돌아 수천 명의 한국인이 학살되었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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