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해주(海州). 정민화(鄭民和)의 아들이다.
1882년(고종 19) 증광시에 병과로 급제, 교리·응교에 임명되었다.
1888년 영흥부 고산의 광부들이 환전수쇄(還錢收刷)와 전 부사 이용익(李容翊)과 현 부사 정광연의 탐학 때문에 난을 일으켜, 관아에 돌입하여 찰방을 구타하고 민가를 때려부순 일이 있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정광연을 파직, 상주로 유배시켰다.
그러나 1890년 부호군으로 고강관(考講官)이 되어 성균관 시험의 하나인 춘도기강(春到記講)을 시험할 때 강생(講生)들이 폐단을 일으켰다고 하여 파직되었다.